3박4일 마산 부산 대구 교구 일대 거룩한 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마산 부산 대구 교구 일대 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기도 순례하는 일정
상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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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간
3박4일
인솔자
출발 1주일전에 확정 문자로 알려드립니다.
포함사항 및 불포함사항
포함사항 | ►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식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
불포함사항 | ► 싱글 비용 ►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 여정 변경 요청시 이에 따르는 추가 비용이 발생됩니다. |
1 DAY | |||
출발 ►경주 성건성당 관아와 옥터 대구대교구 순교사적지 경주 관아와 옥터는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으로 몰려 관장앞에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곳입니다. 1815년 을해박해 때에는 고성운 요셉, 고성대 베드로, 구성열 바르바라, 최봉한 프란치스코, 서석봉 안드레아,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안치룡 등 40여명이 고초를 받았다고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에 따르면 1860년 경신박해 때에도 10명의 신자들이 경주 관아와 옥에서 문초를 당했다고 합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복자가 울산 장대벌에서 군문효수되기 전에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경주시 성건성당이 관할 성당으로 경주옥터는 경주명사마을 우방아파트내에 옥터 표지석이 세워져있고, 경주 관아터는 현재 경주문화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주 진목정 성지 경주 진목정에는 허인백 야고보,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범굴과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후 시신이 안장되었던 의묘가 있습니다. 이양등은 울산 죽령 교우촌의 회장으로 병인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허인백과 김종륜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2년 뒤인 1868년 포졸들이 교우촌에 들이닥쳐 경주 진영으로 끌려간 세 순교자는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사형선고를 받고 울산 장대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이들이 순교한 후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대 인근의 강둑 아래에 안장했고, 박해가 끝난 후인 1907년 박조예의 확인을 거쳐 순교자들의 유해가 발굴되어 유족들에 의해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에 안장되었습니다. 그 후 1932년 5월 말 순교자들의 유해는 월배동 감천리에 있는 교회 묘지로 옮겨졌고, 1962년 10월 교회 묘지 산상에 있는 성모상 앞의 석함에 옮겨 안치되었다가, 1973년 10월 대구시 동구 신천 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옮겨 안장되었습니다. 세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세 순교 복자가 묻혔던 도매산 아래에는 오래된 진목 공소가 있고, 공소를 지나 약 700m 정도 산길을 오르면 1932년까지 세 순교자가 안장되었던 묘지가 있습니다. 대구대교구는 경주 산내 본당에서 진목정에 이르는 도보 순례길을 조성하고, 진목 공소와 순교자들의 묘지 인근에 개인과 가족 위한 피정의 집을 세우고, 세 순교자의 묘지 위에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고자 2014년 5월말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3년의 공사 끝에 2017년 5월 진목정 순교자 기념성당과 하늘원(봉안당)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진목 공소에서 약 3.6km 떨어진 단석산(소태리 단수골)에는 세 순교자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다는 범굴이 있습니다. 소태골 피정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범굴에 이르게 됩니다. ![]() ►청도 용성성당 구룡공소 구룡 공소는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 정상리와 경상군 용성면 매남리 및 영천군 대창면 용호리와 경계 지점에 있는 구룡산(675m)의 산정에 위치한 깊은 산골의 교우촌이다. 진목정 공소와는 불과 15∼20km의 거리에 있다. 이 깊은 산골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구룡산 바로 아래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던 자인현의 구룡(현 경산군 용성면 매남 3동 큰골의 기방우)에 교우촌을 이루어 살다가 다시 박해를 만나자 박씨 등이 이곳 구룡산 정상으로 다래덩굴을 헤치고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어서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선의산의 신자들과 서로 내왕을 하면서 프랑스 신부들의 방문을 받아 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살티의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도 병인박해 때 간월에서 체포되어 경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9개월간 감옥에 갇혔다가 마침 나라의 경사로 풀려난 후 이곳 자인골 용성면 매남 3리(큰골)로 와서 3년간 살다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다시 언양의 안살티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아 생긴 종지뼈의 상처로 3년간 더 고생을 하다가 1875 년에 그 후유증으로 치명하였다. 또한 병인박해 중(1866∼1873)에는 영천군 대창면 효일 부락에 살던 이규일(1835∼1880)이라는 신자가 박해를 피해 단신으로 이곳 구룡 공소에 와서 살다가 188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대구대교구 무학중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이임춘 신부의 증조부인 이종건(1837∼1900)도 산 아래 용성면 매남리에 살다가 이곳 구룡 공소의 박씨 가정의 딸과 혼배를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지금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또한 그 무렵에 이종건의 친척인 이종선 가정과 김종화 야고보 회장 가정, 그리고 최순집 회장의 부친인 최팔영 아오구스티노 가정도 이곳으로 피난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 후 1882년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가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을 때는 공소 신자가 60명이었으며, 그중에 53명이 고해성사를 보았고 50명이 영성체를 하였으며 6명의 외교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교세 통계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후 1893년 11월에는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언양, 선필, 진목정, 의실 공소 들을 방문한 후 이곳 구룡 공소와 자인 큰골 공소(용성면 매남리)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언양 살티공소 살티 공소(1868년~)는 인근의 간월 공소와 대재 공소가 박해로 파괴되면서 설립되어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입니다. 박해 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맹수가 많아 사람이 찾아 들기 힘든 은밀한 지역이었기에 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피난처였습니다. 혹독한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안살티에 정착해 살던 신자들은 논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를 찾아 현재의 공소가 있는 살티로 내려와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공소 인근에는 극심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고생하다가 1876년 살티에서 치명한 김영제 베드로의 묘가 있습니다. 후손들에 의해 순교자들의 신앙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살티는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온 교우촌이자 최재선 주교를 포함해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聖召)의 고장입니다. 현재의 공소 건물은 1982년에 부산교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언양 성당 경상도 남부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언양 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늦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역에는 경남 최초의 공소인 내간월 불당골 공소가 있었는데, 불당골은 김재권(프란치스코)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던 곳입니다. 불당골은 선교사들을 맞이할 무렵 공소로 변모했으며,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주교가 방문하던 1850년대 말에는 언양 일대가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변모되어 간월, 죽림(대재, 죽령), 탑곡, 예씨네골, 진목정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지만 박해가 끝난 뒤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 신부가 1883년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도 설립하였습니다. 언양 지역의 신자들은 이미 1888년부터 본당 설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1926년 12월 5일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 신부가 부임했습니다. 보드뱅 신부는 즉시 성당 신축을 계획했고, 1929년 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여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보드뱅 신부가 직접 설계를 맡고, 명동 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과 6년에 걸친 신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언양 성당(사제관 포함)은 고딕식 형태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입니다. 또한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했습니다. 1986년 죽림굴을 찾아냈고, 1989년 새 사제관을 완공한 뒤 이듬해 12월 옛 사제관 자리에 ‘신앙유물 전시관’을 개관했습니다. 2004년 근대문화유산 제103호로 지정된 성당과 신앙유물 전시관은 7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뒷산으로 올라가면 병인박해 순교자 오상선의 묘가 있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산 정상에 오르면 언양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성모동굴이 있습니다. ►울산 병영 순교성지성당 1860년 경신박해 때와 병인박해 중인 1868년, 두 차례의 큰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울산병영 장대에서 순교했습니다. 경신박해 때 백지사형으로 순교한 오치문, 병인박해 때 경주 감옥에 갇혔던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회장 등이 이곳에서 군문효수를 당했습니다. 이 세 순교자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중의 대재 공소[죽령]로 숨어들었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를 거쳐 울산병영 장대로 압송되어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순교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세 순교자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가 수습해 사형장 근처 강둑 아래 가매장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교인들의 장례가 가능해지자 1907년 유족들에 의해 연고가 있는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으로 옮겨 합장했습니다. 그러다가 1932년 5월 말 유족들에 의해 대구 월배 천주교회 묘지로 다시 이장하였고, 1962년 10월 월배 교회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안장했다가 1973년 10월 19일 대구시 동구 신천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복산 성당(전 울산 성당)에서는 1957년에 태화강변의 새치벌에 작은 팻말을 세워 순교자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고 하는데, 강변 정비로 지금은 어떤 표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후 순교터를 보존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1977년 동천강변에 순교지 535평을 매입하고, 1979년 9월 본당 사목회가 중심이 되어 개발에 착수해 순교자 현양비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상 그리고 야외 돌제대를 설치하였습니다. 부산교구는 2013년 4월 울산병영 순교성지성당 기공식을 갖고 순교지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 이듬해 3월 2층 규모의 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허인백, 김종륜, 이양등 세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 ►밀양 김범우 순교성지 한국 천주교의 첫 증거자 또는 첫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 토마스의 묘가 발견된 것은 1989년입니다. 이전까지 그의 유배지는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졌지만 1980년대 초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이 나타나면서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丹場)임이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그 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1989년 극적으로 김범우의 외손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묘를 찾았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천주교의 전래는 바로 김범우의 귀양살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김범우는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위해 명례방(현 명동 성당 인근)에 있던 자신의 집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형조에 끌려가 많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끝내 배교하지 않은 그는 멀리 밀양으로 귀양을 떠났고, 유배생활 중에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전파하던 중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1786년 가을(혹은 1987년 초)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범우의 묘를 발굴한 이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주변 땅을 매입하여 순교자 묘역을 조성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돌제대와 너른 잔디밭을 조성하고, 묘역에 이르는 산길에는 대형 원석에 그림을 새긴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습니다. 묘역 주차장에서 묘역에 이르는 길목에는 20개의 돌에 한국 천주교회의 기념비적인 사건들을 기록하는 등 수년간 묘역을 단장한 후 2005년 9월 묘역 준공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9월에는 순례객을 위한 순교자 김범우 기념 성모동굴성당 봉헌식을 가졌고, 김범우의 시복시성 운동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7년 9월에는 김범우 순교자 성지 내에 교육관 및 피정의 집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석식 호텔 숙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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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
#RESO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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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
아침 : 점심 : 저녁 : |
2 DAY | |||
조식 ►부산 오륜대 순교성지 오륜대 순교자 성지에 들어서면 먼저 순교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의 흉상, 그리고 성모자상이 순례자를 반기며 서 있고,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이란 글귀 너머로 박물관과 순교자 성당 그리고 그 뒤로 우거진 숲이 펼쳐집니다. 박물관 옆에 있는 순교자 성당 앞에는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 신부와 다블뤼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서 제주도로 표류한 끝에 강경 부근 황산포에 상륙한 라파엘호 축소 모형이 놓여있고, 그 옆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돌 형구가 있어 당시 박해 상황을 한마디로 이야기해 주는 듯합니다. 성당 뒤로는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이 이어지는데, 그 초입에 병인박해의 서슬 아래 1868년 수영장대에서 순교한 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를 포함한 8위 부산 순교자 묘역이 말끔히 정돈되어 있습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194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에 의해 '복음 선포와 순교자 현양'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수녀회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순교 신앙을 후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 순교자 관련 유물과 교회사 관련 자료 등을 수집하거나 기증받아 이를 전시할 기념관 설립을 계획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967년에 절두산 순교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박물관)과 성당을 건립하자 수녀회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 지역에 한국순교자기념관을 건립키로 결정하고 현 오륜대 부지에 분원을 설치했습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순교자기념관 및 순교자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1977년 7월 한국 순교성인 유해 26위를 안치한 순교자 성당 축복식, 1981년 10월 한국순교자기념관 축복식과 척화비 복제, 라파엘호 모형 제작,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성모동굴 조성 등을 마쳤습니다. 1982년 9월 개관한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은 많은 수녀들이 전국에서 수집 · 연구하고 간직해 온 순교자들의 유물과 서책 및 형구 등을 소장하고 있고, 순종비 순명효황후와 의친왕비 김수덕 마리아가 기증한 궁중 · 왕실 유물과 김인순 루갈다가 기증한 조선시대 민속품 등이 전시되어 있어 조선 말기와 개화기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2009년 3월 부산시에 1종 전문 박물관인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으로 등록되어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교육 ·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2013년 10월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이어 성지를 관리하게 된 부산교구는 '오륜대 순교자 성지'로 명명하고 전담사제를 파견하여 본격적인 성지 정비 작업에 힘쓰고 있습니다. 2014년 9월 시복식을 기념해 성지 입구와 복자 흉상을 설치하고 순교자 묘역을 재정비했습니다. ►부산 수영장대순교성지 우리나라 최대 항구 도시인 부산에는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안동에 경상좌수영이 있어서 붙잡혀 온 천주교인들을 이곳에서 처형하곤 했습니다. 오늘날 동네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수영 장대골에서는 병인박해 당시 동래의 전교회장이던 이정식 요한을 비롯한 8명의 천주교인들이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이정식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임을 거치던 중 59세의 나이에 천주교에 입교한 후 무관직을 사임하고 가족과 이웃들을 권면하여 입교시키는 등 누구보다 수계와 전교에 열심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동래의 전교회장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다하던 중 병인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그는 가족들과 함께 기장으로 몸을 피했다가 1868년 봄 울산으로 다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점점 심해지고 동래 포졸들 역시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고 그들의 종적을 찾았습니다. 결국 이정식의 가족은 울산에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동래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이정식은 앞서 동래에서 체포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했습니다. 동래 부사는 그들을 47일간 가두어 두고 여러 번 심문하며 형벌을 가했으나 전혀 흔들림이 없자 경상 좌수사에게 넘겨 사형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1868년 9월 이정식과 그의 아들 부부 등 8명은 수영장대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들이 순교한 후 이정식 회장의 가족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내로 옮겨 안장되었습니다. 이때 나머지 4명의 순교자들은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기념비만 건립했습니다. 광안 성당은 1987년 6월 신자들의 헌금으로 이곳의 땅을 확보하고 이듬해 7월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가 성역화에 착수하여 공사를 완공하고 그 해 9월 순교 기념비 제막식 및 현양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어서 광안 성당은 2004년 7월 성지에 대형 십자가와 십자가의 길 14처, 이정식 등 8위의 위패를 설치한 후 새 성물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이정식과 양재현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김해 조씨 형제 순교자 묘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배씨 가문의 선산에는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증거하고 죽음을 택한 조석빈과 조석증 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습니다. 창녕 조씨 김해파의 30대 손으로 태어난 석빈과 석증은 천주교에 입교한 후 열심히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조씨 형제는 모습과 나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상자를 매고 주로 양반들을 찾아다니면서 천주학 연구와 전교에 앞장섰습니다. 생곡의 배씨 사랑방에도 자주 들러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도 힘썼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김해읍 왜장대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들의 시신은 사학죄인이라 하여 문중의 반대로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방치되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의 고 배문한 신부의 3대조인 배정문 공에 의해 집 뒤 언덕 밭에 암장되었으며, 그 후 배문한 신부 본가에서 4대에 걸쳐 조씨 형제의 묘를 보호 · 관리해 왔습니다.
조씨 형제의 순교에 관한 구전이 배씨 집안을 통해 대대로 전해오다가 1989년 6월 부산교구에 의해 묘지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1995년 5월 이갑수 주교의 집전으로 순교자 형제 묘소 단장미사가 봉헌되었고 묘비를 겸한 돌 제대를 세워졌습니다. 1997년 11월 부산교구 교회사연구소 ·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 배문한 사제 사랑 기념사업회에 의해 묘소 주변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묘소 뒤 바위 위에 대형 돌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또한 1998년 8월 형제 순교자 묘 바로 아래에 있는 고 배문한 신부(1994년 8월 5일 강원도 삼척시 인근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신자들을 구하고 선종)의 생가를 개수하여 순례자들이 쉬었다 갈 수 있게 강당과 방도 마련했습니다. 중식 ►거제도 순교자의 딸 유섬이묘 ![]() ►거제도 복자 윤봉문 요셉성지 거제도 진목정 족박골(현 옥포)에는 ‘거제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묘가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당시 신자들의 유배지였던 거제도에 병인박해 직전 리델 신부가 전교를 위해 다녀가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8년경 박해를 피해 거제로 들어와 진목정에 정착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아들로 진 아녜스와 혼인하여 아들딸을 낳고 살면서 형 경문 베드로와 함께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썼습니다.
1887년 겨울, 대구 본당 초대주임인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방문했을 때 신부를 안내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을 돕던 윤봉문은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봄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공적인 박해가 끝났지만 지방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탄압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박해는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고 천주십계와 성교사규를 외우던 그는 결국 진주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장재리 공소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가 1898년 옥포 교우이며 부산 본당 우도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와 유족들에 의해 옥포의 선산으로 이장했습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1978년 9월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고, 거제와 통영 지역 본당들은 순교자에 대한 현양 사업과 함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거제도 일운면 지세포리의 순교자 윤봉문 요셉 성지는 옥포의 순교자 묘소가 산중에 있어 접근이 어렵고 또 후손들의 선산이 타인 소유로 넘어가자 새로운 이장 부지로 선정된 곳입니다. 거제도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고, 중앙에 순교자 현양비도 건립되었습니다. 마산교구는 순교자 유해 이장에 관한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교구장 교령과 훈령을 발표하고 2013년 4월 20일 순교자 유해를 옥포에서 지세포리로 이장하였습니다. 윤봉문 요셉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가 있습니다. 1822년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난 정찬문은 대산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칠원 윤씨와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습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습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 가을 진주 포졸에게 체포된 정찬문은 감옥에서 25일 동안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은 그는 모진 매를 견뎌내고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던 그의 시신을 사촌들이 몸체만 수습해 고향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두묘로 불리기 시작했고, 그 후 순교자의 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잊혀갔습니다.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신부는 굼실 공소 회장에게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48년 3월 무촌리에 살던 광산 김씨 할머니의 제보를 받아 허유 고개 길섶에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았습니다. 그 해 5월 31일 순교자의 유해를 확인하고 그 앞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 후 1975년 그 인근에 새로 조성된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했고, 1978년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순교비를 건립했습니다. 순교자의 묘소를 보존해 온 문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정찬문 안토니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석식 창원숙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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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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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진례면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2년 현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입교한 후 가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8년 무진박해 때 대구와 김해에서 온 포졸들에게 잡혀 조카 박수연과 함께 김해 관아로 압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만나 3일간 문초를 받으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고, 대구로 압송되어 감영에서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합니다.
결국 박대식은 1868년 10월 12일 조카와 송 마태오, 박 요셉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가족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와 선영에 모시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인근의 유씨 문중 산에 평장으로 매장했습니다. 그 후 1956년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했습니다. 1966년 진영 본당 주임신부의 주선으로 순교자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고, 2001년 그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이 밝혀졌습니다. 진례 성당은 매년 후손들과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박대식 빅토리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양산 죽림굴 성지 죽림굴, 곧 대재 공소(1840-1868년)는 울주군의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천연 석굴로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눈에 잘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월 공소의 교우들이 보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하여 공소를 이룬 곳으로,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입니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가 약 3개월간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하고, 스승에게 보낸 마지막 서한을 썼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때 김영제 베드로의 누이동생인 김 아가타가 포졸들을 피해 도망쳐와 3개월간 머물며 최양업 신부를 돕다가 선종한 곳입니다. 울산 병영 장대에서 순교한 대재 공소 회장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김종륜 루카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집니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재 공소는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1986년 10월,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평신도 11명이 죽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그 해 11월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굴 안에서 구유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996년 2월에는 죽림굴 주변을 정리하면서 안내석을 새로 세우고 입구에 계단도 만들었습니다. ►밀양 명례성지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인 명례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입니다. 명례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가 출생한 곳이며, 오래된 교우촌으로 1897년 영남 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입니다. 또한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 방인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사목하다 돌아가신 곳입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태어나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낙동강을 건너는 명례 나루터에는 일찍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정착했고,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은 듯합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사하러 갔다 오던 중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밀양으로 압송되었고, 대구로 끌려가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형을 받은 뒤 3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이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왔지만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고, 1975년 12월 진영 본당 신자들에 의해 본당 공원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마산교구는 2008년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인근에 있는 명례 성당을 성역화하기 위해 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현 성당은 강성삼 신부가 1898년에 처음 지은 후 1928년 권영조 신부 때 기와로 다시 지어 축복식을 가진 성당이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된 후 1938년에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입니다. 위원회는 2009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2010년 생가터와 성당 주변을 매입해 돌제대를 설치하고 조경공사를 시행한 후 성당과 그 일대에 대한 문화재 등록을 신청해 다음 해 2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1년 1월부터 성지 담당신부가 부임하여 신석복 순교자 생가터의 축사를 이전 철거한 뒤 6월에 사제관과 생가터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8년 5월에는 신석복 순교자 생가터에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중식 ►대교구청 성모당, 성직자묘지 대구대교구청 내에 위치한 성모당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순례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열린 성지, 치유의 성지입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 · 설치되면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교구에 꼭 필요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을 이뤄주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여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허원을 드렸습니다.
1913년과 1914년에 주교관과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건립했고, 주교좌성당 증축이 늦어지던 중 당시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 신부가 중병을 앓아 선종 직전에 이르자 드망즈 주교는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습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 마침내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해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킵니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입니다.
성모당은 신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거룩한 땅일 뿐 아니라 각종 가톨릭 신심행사와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사적지로 외교인들도 큰 호기심을 갖고 있는 대구의 명소입니다. 1990년 12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보수공사를 하여 새로 단장했습니다. 2009년에는 로마의 성모 대성전과 영적인 유대를 맺은 성모 성지로 지정되었습니다. 2018년 10월에는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행사와 기념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성유스티노신학교 1911년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 · 신학교 · 주교좌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루르드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지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고, 그 결과 1912년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아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명명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여 1918년 첫 출신 사제를 배출했습니다. 사제양성 교육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신학교는 일제에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었습니다.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 부대에 징발되었습니다. 1982년 사제 양성을 위해 47년 만에 선목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한 후 1985년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고, 1994년에는 효성여자대학교와 통합하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대구관구 대신학원)이 되었습니다.
옛 성 유스티노 신학교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중앙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었으며, 1층 전면에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사용되던 연속 아치가 있어서 툇간 역할을 했습니다. 1946년 당시 폐교 상태에 있던 신학교는 대건초급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대건중고등학교 교사로 사용되다가, 1991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이전해 오면서 전면으로 돌출되었던 양 날개가 철거되고 성당을 포함한 중앙 일부만 남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신학교 건물은 1990년 12월 15일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4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기존 건물을 재정비해 ‘성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을 개관하였습니다. ►관덕정 순교기념관 대구 관덕정(觀德亭)은 조선 시대 무과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영조 25년에 세워졌습니다. 관덕정 앞마당에 자리한 연병장에서는 무과를 위한 활쏘기와 말타기, 세시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도 행해졌습니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연관을 맺은 것은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처형장에서 천주교인들이 순교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천주교인들은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선조 34년에 경상도 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경상도 전역의 교우들이 대구로 이송되어 감영에서 옥사하거나 처형장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렇게 관덕정과 감영 등 대구 지역에서 순교한 20위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관덕정이 순교성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순교자 이윤일 요한이 시성되면서부터입니다. 대구대교구는 사형터로 고증된 부지를 확보하여 1985년 순교기념관 기공식을 시작으로 1991년 1월 20일 지하경당 축복식과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갖고 그해 5월 31일 개관하였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당시 관덕정 모습을 재현한 순교 기념관에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와 함께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 그리고 영남 지역 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덕정 순교 기념관은 순교정신을 함양하고 신자들의 신앙 재교육과 선교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2년부터 매년 ‘성 이윤일 요한제’를 기획 · 거행하고 있습니다. 2002년 1월 21일에는 기념관 입구에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의 동상을 세웠고, 2007년 1월 21일 기념관 바로 옆에 신관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회의실과 강당 등을 갖춘 신관은 순교신앙 학습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개관 25주년을 맞아 2014년 시복된 124위 중 이곳에서 순교한 11위 ‘순교 복자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했습니다. ►주교좌 계산성당 계산 성당은 1886년 블랑 주교에 의해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11년 대구대목구의 신설과 함께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는 박해의 여파로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 박해 이후 죽밭골로 옮겼고, 1891년 대구 교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으로 대구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해 다시 대구로 돌아온 로베르 신부는 대어벌에 임시 성당을 구했고, 이어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했습니다.
1899년 전통 한식의 목조 성당을 완공해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축성식을 거행했으나 1901년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재차 성당 건립을 시작해 1902년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식 벽돌조 성당을 준공했습니다. 두 번의 성당 내부 공사에 이어 1918년 기존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당의 동남북 3면을 증축해 1919년 5월 재차 축성식을 갔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계산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어 1991년 성당 건립 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고,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1986년 성당 마당 한 편에 자그마한 공원을 조성하고 계산 성당을 지은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2006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맞아 문화관 2층에 유물 전시관을 마련하였고, 2009년에는 대구시에서 추진 중인 근대문화거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성당 외벽 조명을 설치하고 성당 마당을 공원으로 조성해 열린 공간으로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대구복자성당 대구 도심에 위치한 복자 성당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3위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입니다. 울산 장대에서 한날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이들의 시신은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에 의해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강둑 아래 가매장되었다가 1907년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 합장되었습니다. 그 후 1932년 월배동 감천리의 교회 묘지로 옮겨졌다가 1973년 복자 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산내면 단석산의 범굴에 피신하던 이들은 1868년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 진영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곤장으로 피와 살이 터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경주 진영에서 병마절도사가 있는 울산까지 80리 길을 걸어 도착한 울산 장대에서 그들은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복자 성당은 대구대교구가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기념해 교구민의 성금으로 1970년 설립한 성당으로 1973년 3위 순교자의 유해를 이장하면서부터 도심의 순례지로서 순교신심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2002년 순교자 묘역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묘소를 새로 단장하고 묘역 둘레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으며, 묘소 앞에는 넓은 잔디마당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성당 내부 제대와 감실에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여러 성인들의 유해를 안치했습니다. 2010년에는 노후화된 성당을 보수해 3위 순교자를 기리는 성당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한 후 감사미사를 봉헌했습니다. 3위 순교자는 모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경상감영과 옥터 ►비산날뫼성당 석식 호텔 숙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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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 ►대구 새방골성당 ![]()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1894년 신나무골에서 경상도 북부 지방 선교를 담당하던 파이야스 신부는 가실(佳室)로 이주하여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가실 성당을 설립했습니다. 1912년 부임한 투르뇌 신부는 1944년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가실 본당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제 강점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또한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1925년 9월 드망즈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사절 지아르디니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했습니다.
투르뇌 신부는 1922-1924년 사이에 현재의 신 로마네스크식 벽돌조 성당을 건립했는데, 설계는 명동 성당과 대구 계산 성당을 지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와넬 신부가 담당했습니다. 프와넬 신부는 중국 기술자들에게 벽돌을 한 장씩 굽도록 하여 잘 구워진 것은 성당을 짓는데, 중간치는 사제관을 짓는데, 품질이 나쁜 것은 버렸다고 합니다. 당시의 유물과 유산은 현재 유물관(구 사제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도시화와 탈농촌 현상으로 신자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1990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성모동굴과 교육관을 마련하여 1995년 100주년을 맞아 봉헌했습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동양화가 손석희가 그린 십자가의 길 14처와 독일의 유명한 색유리 작가 에기노 바이너트가 제작한 유리화를 2002년에 설치했습니다. 10개의 창문에 설치된 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대구대교구에서 현 계산 주교좌성당에 이은 두 번째이자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인 가실 성당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근대 건축사와 교회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옛 사제관과 함께 2003년 4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구대교구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낙산 본당으로 변경된 본당명을 2005년 2월 본래의 가실 본당으로 다시 변경했습니다. 2011년 7월에는 16년이나 늦었지만 충분한 자료를 토대로 “가실(낙산) 성당 100년사”를 출판했습니다. ►칠곡 신나무골 성지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신나무골은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면서도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가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고, 샤스탕 · 다블뤼 · 최양업 · 리델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박해가 잦아들면서 다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영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순회 전교를 시작했습니다. 1885년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짓고 정착한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대구 본당을 설립하고 곧이어 대구 읍성 전교에 나섰고, 1898년 계산동에 십자형 한옥 성당을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그 자리에 현 계산동 주교좌성당의 원형이 되는 라틴 십자형의 고딕 성당을 지어 1903년 축성식을 올렸습니다.
대구 교회 첫 본당 터인 신나무골 성지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성지 입구로 이장했습니다. 이선이 엘리사벳과 그의 남편 배정모 그리고 세 아이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칠곡을 떠나 잠시 신나무골로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한티로 다시 숨어들었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남편 배정모는 배교했지만 이선이 엘리사벳과 장남 스테파노(배도령)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그 자리에서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배교하고 풀려났던 남편은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아들의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다가, 다시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신만 이장했습니다.
1977년 제1차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지를 관할하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를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에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등을 2차로 복원했습니다. 2015년 대구대교구로 성지 관리가 이관된 후 기존에 복원했던 건물을 철거하고 3차 성지 개발에 들어가 2019년 5월 새 한옥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새 성당은 로베르 신부가 현 계산 주교좌성당 자리에 지었던 첫 한옥 성당을 재현한 것입니다. 이로써 화재로 소실된 대구대교구의 첫 성당을, 대구의 첫 본당이 시작된 터에 다시 세웠습니다.
►칠곡 한티순교지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심심산골에 있는 한티는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몸을 숨긴 곳이자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순교성지입니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인근 신나무골과 비슷한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산 것으로 추정됩니다. 1860년 경신박해로 큰 아픔을 겪었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 안에서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넘긴 한티 마을은 1866년 시작하여 3년 가까이 이어진 병인박해의 여파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됩니다. 1868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습니다. 박해 소식을 들은 인근 교우들이 왔을 때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했고,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의 묘는 모두 37기로 그중에서 조 가롤로 가족 등 4기만 신원이 알려져 있습니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조영학 토마스(조 가롤로의 아들)와 몇몇 교우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이어가기 위해 공소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재건된 공소는 1900년 초 신자 수 80여 명 이상의 전성기를 거쳐 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기까지 공소의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순교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과 조사를 시작한 대구대교구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확인하고, 1991년 피정의 집, 1995년 성지 관리 사무소, 1998년 옛 공소 복원, 2000년 대구 대신학교 영성관, 2004년 순례자 성당 축복식, 2016년 한티 가는 길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현재 국내외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 성지에서 많은 영적인 힘을 받아 가고 있습니다. 또한 박해시대 한티의 교우들이 신나무골을 오가며 걸었던 한티가는 길을 찾는 도보순례자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에 처음 성당이 들어선 것은 1901년.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소백산맥을 넘어온 충청·전라·경상도 신자들이 김천 깊은 산중에 정착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린 지 35년만입니다. 당시 김천 지역은 1894년 설립된 가실본당(현 낙산본당, 경북 칠곡군 소재) 관할이었지만 미래 발전 가능성을 예감한 주임 김성학 신부(1870~1938)가 김천에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조선교구장 뮈텔 대주교에게 건의함에 따라 가실본당에서 분리 신설되었습니다.
김 신부가 초가 한 채를 구입, 세운 첫 성당은 지금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07년 그 자리에 기와집을 지어 성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김천본당은 상주, 문경, 예천, 성주, 황간 등 경북 북부지역 복음화에 매진, 1911년에는 신자수 25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이에 본당은 1934년 협소한 기와 성당을 허물고 바로 옆에 붉은 벽돌조 고딕식 성당을 신축했고, 1958년 김천 평화동본당을 분가하면서 행정구역 명칭을 따라 김천 황금동본당으로 바꿨습니다. 이후 지례·지좌본당을 분리 신설하는 등 김천지역 복음화 산실이 됐고, 대희년과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2000년에 구성당은 그대로 보전한 채 옛 기와 성당 터 바로 옆에 100주년 기념성전을 세웠습니다. 성당 마당 왼편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천 지방 순교자 유 시몬과 무명 동료 순교자 네 명의 거룩한 삶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본당이 100주년을 맞아 세운 순교자 현양비가 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사랑과 나눔 공원’이 경북 군위군 군위읍에 조성됐다. 군위읍 용대리 3만 2128㎡터에 꾸며진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에는 김 추기경 생가와 옹기가마, 스테파노 경당, 십자가의 길, 추모전시관, 추모공원, 평화의 숲, 잔디광장이 들어서 있다. 공원에서 약 500m 떨어진 옛 군위초등학교 용대분교 자리에 청소년수련원을 새롭게 꾸몄다.
김 추기경의 생가는 대구대교구가 매입해 2005년부터 관리해오다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1920~1930년대 초가로 복원했다. 생가 앞에 재현해 놓은 옹기가마는 옹기장이의 아들로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사제 성소를 키웠던 김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추모기념관은 김 추기경의 생애 전반을 볼 수 있는 각종 사진과 동영상 자료, 기록물,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특히 김 추기경의 체온이 배어 있는 제의와 미사 도구, 십자가, 필기구 등은 이 시대 사랑의 사도로 살아온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념관 천장은 김 추기경의 아호인 ‘옹기’를 주제로 십자가 모양의 조명을 설치해 놓았다.
추모기념관 옆에는 김 추기경의 생애를 묵상하며 조용히 기도하고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스테파노 경당이 마련돼 있다. 추모정원은 김 추기경의 사진과 말씀을 타일로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고, 평화의 숲에는 김 추기경의 나이와 같은 86개 계단이 십자가 모양으로 조성돼 있으며 계단 끝에는 예수상이 서 있다. 용대분교에 새로 꾸민 청소년수련원은 100여 명을 동시에 수용 가능한 숙박시설과 강당, 운동장, 미니야영장, 나무놀이터, 수련의 숲, 암벽등반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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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체크사항
버스/항공/선박/기차 | 버스 ① 멀미를 대비해 멀미약을 적어도 6시간 전 복용한다. ② 버스 좌석제 이용인지 선착순 좌석 배정인지 확인한다. ③ 버스 넘버와 출발피켓명을 확인해 둔다. ④ 다른 승객에게 불쾌감을 주는 간식은 가능한 피한다.(오징어 등) 항공 ① 항공사 예약번호 및 발권 카운터 확인 ② 신분증 필참/ 신분증 없는 소아나 유아는 가족증명원이나 의료보험증으로 대체 ③ 공항에 출발 1시간 전 미리 도착하여 수속 진행 필수 ④ 공항버스 사전 확인 통해 공항 도착 시간과 안배 선박 ① 여객선 선표 발권시 모든 탑승객 신분증 필참 ② 배멀미 방지를 위해 최소 6시간 전 복용 ③ 여객선 탑승시 풍랑주의보 등 기상체크 ④ 지정된 좌석에 탑승 ⑤ 캐리어 등은 지정된 장소에 별도 보관 기차 ① 온라인 상에서 사전에 예매해둔 좌석 번호 위치 파악 ② 캐리어 등 별도 보관 장소에 보관 ③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신분증 지참 |
여행 준비물 | 국내 여행 준비물 - 신용카드, 신분증, 여행 여비, 개인 세면도구, 운동화, 슬리퍼, 갈아입을 옷, 잠옷, 속옷, 양말, 타올, 머리밴드, 상비약(지혈제,지사제,해열제,소화제,멀미약, 평소 복용중인 약), 접이식 우산, 카메라, 휴대폰, 휴대폰 충전기, 여유분 배터리, 삼각대, 셀카봉, 스킨 로션, 선크림, 클렌징, 마스크, 손소독제, 바람막이 점퍼, 렌트카 이용시 운전면허증 - 여름과 겨울에 맞추어 수영복, 수영모, 물안경, 선그라스, 선크림, 모자, 샌들/ 장갑, 패딩, 스카프 목도리 등 방한용품, 손난로 |
여행자보험 | 계약보험사 :악사손해보험/ 동부화재보험 · 여행자보험은 기본 최대 5천만원 보상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 여행상품 및 연령에 따라 가입 가능 한도가 상이합니다. (*보험 기간 연장 및 보험 보장 범위 확대를 원하시는 경우, 출발 전 판매담당자에게 반드시 추가 요청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여행자보험 보장기간은 여행종료일로부터 180일(상해, 질병 한정)까지이며, 사고일로부터 3년 이내에 보험청구가 가능합니다. · 여행자보험은 실손 보상 보험으로, 보상한도 내에서 심사 지급되며, 타보험사와 중복 가입 시 비례보상됩니다. · 국내치료비 접수 시, 자기부담금 공제 후 지급됩니다. · 진료와 무관한 제비용(제증명료, 의료보조기구 구입비)이나 국내 통원 치료 시 치과치료(보철/임플란트 등), 한방치료, 미용치료에서 발생한 비급여 의료비는 보상되지 않습니다. · 본인 부주의에 의한 휴대품 분실/파손, 현금/유가증권 등의 도난 사고 및 기존병력으로 인해 여행 기간 중 발생되는 사고에 대해서는 보상되지 않습니다. · 항공사의 과실로 인한 수하물 파손/분실은 즉시 공항에서 항공사에 신고하여 항공사 선(先)배상 후 여행자보험 필요 시 청구하시기 바랍니다. · 위 사항은 약관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으로 세부 내용은 반드시 약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 <국내여행자보험> · 국내여행자보험의 경우 가입 한도 상향이 불가합니다. · 일부 상품의 경우 여행자보험 가입이 불가할 수 있습니다. (여행자보험 가입을 원하실 경우에는 개별 가입을 권장합니다.) 단, 여행 일정중에 이용되는 교통수단(항공,철도,선박,버스 전용차량 등)은 각각 별도의 보험이 가입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여행일정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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