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진정으로 죽이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만약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죽음의 공포 속에 떨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목전에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올라가셨고 그렇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석사 논문 발표 때 그리스도론 교수님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곧 구원이고 생명이라고 썼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믿음이 있으셨나?”
그리스도께서 믿으셔야 했던 대상은 당연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하느님으로서 어떻게 같은 분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톨릭 교리의 가장 중요한 획을 그으셨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항상 함께 계시고 항상 그 분을 보시기 때문에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있을 수 없다.’라고 결론 내리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지 보이는 것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명을 준다.’는 명제가 옳은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도 당연히 믿음을 지니고 계셨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의 ‘모델’이 되셔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 하느님을 보지 않았듯이, 완전한 죄의 보속은 하느님과의 단절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다시 부활시키신 것은 바로 아들의 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을 버리셔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끝까지 믿고 생명을 바쳤기 때문에 그 생명을 다시 받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는 ‘믿음’이 없고서는 어떠한 ‘생명’도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혈병에 걸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에게도,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또 회당장의 딸도 비록 죽어있었지만 아버지의 믿음으로 부활합니다. 예수님은 통곡하는 이들에게 그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비웃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곧 생명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내쫓으십니다. 그럼으로써 죽은 이는 다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치 않는 이는 생명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탄생을 그릴 때 하느님과 아담이 서로 손가락이 마주치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두 손가락을 비교해보면 아담의 손가락은 힘이 없이 축 늘어져있고 하느님의 손가락은 힘 있게 곧게 펴져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모든 에너지와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손을 뻗혀 그분의 옷자락을 잡은 자신의 손을 통해 자신 안에 퍼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매 순간 결코 그분의 옷자락에서 손을 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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