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의 4 천주당
북경에는 대표적인 4개의 천주당이 있다. 왕푸징(王府井)의 동당, 서 십고(西什庫)의 북당, 썬 무문(宣武門)의 남당, 그리고서 직문(西直門)의 서당이 바로 북경의 대표적인 천주당 들이다. 그중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은 남당으로,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 신부가 명의 신종에게 신무문 안의 땅을 하사받아 건립하였다.
이들 4개 성당은 북경의 명소로서 많은 외국인들이 찾았는데, 특히 남당과 동당은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을 가져서 귀 문명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에 서학(西學)이 전래되었다. 1644년 아담 샬을 만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하여 1631년 정두원, 1720년 이명 등이 서학 등을 전래한 인물들이다.
서십고 천주당 西什庫 天主堂 [북당 北堂]
북당으로 알려진 북경 서십고 천주당은 1784년 한국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곳이다. 따라서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직접적 계기가 된 곳이다.
북해공원에서 서사(西四, 西單의 북쪽) 방향으로 가면서 싶고(西什庫)라는 곳이 있다. 지하철 4호선 서사 역에서 하차하여 동쪽 북해 쪽으로 약 20분 거리에 있다. 서 싶고란 10군데의 창고라는 의미인데, 이런 지명이 붙은 연유는 명대 궁정에서 사용되는 물품을 저장하던 창고들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열 개의 창고가 있었으며 각각 곡류, 무기류, 천, 모피, 실크 등 전국에서 물품들이 공수되어 올라오면 이곳에 저장하였다고 한다.
청대에 들어와서 이런 기능이 사라졌고, 각각의 창고는 민간주택이나 기타 용도로 변경되어 현재는 단 한 곳도 제 기능을 하는 곳은 없으며 지명만 남아있다. 한국 천주교회와 첫 인연을 맺은 북당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드 퐁타니(JeandeFontaney, 洪若翰, 1643~1710) 신부가 건립하였으며, 명말청초에 북경에 건립된 4개의 성당 가운데서 본래의 형태가 남아있는 유일한 천 주당이다. 그는 키니네를 사용하여 강희제의 학질을 고쳐준 공로로 하사받은 서안 문밖의 부지에 1701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03년 12월에 축성하였다. 이때 강희제는‘칙권 천주당’(勅建天主堂)이라는 명문을 하사했다.
앞서 프랑스에서는 1684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중국 전교권을 인정받은 뒤 예수회 선교사들 중에서 드 퐁타니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보호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로 인해 마카오를 경유하지 못하고 1687년 말에 영파(寧波)에 도착하였으며, 이듬해에 천진을 경유하여 2월 8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중에서 부베(Bouvet, 白晉)와 제르비용(Gerbillon, 張誠) 신부는 북경에 남아 궁정에 봉사하였으며, 드퐁타네와르콩트(LeCormpte, 李明), 비델로(Visdelou, 劉応) 신부는 지방 전교에 착수하였다. 그러다가 강희제가 하사한 부지에 북당을 완공 축성하여 전교의 본거지로 삼게 되었다. 북당은 원래는 중남해 근처에 있었는데 천주교를 별로 안 좋아한 서태후의 명으로 19세기 후반 이곳으로 이전하여 여러 차례 중축되었다. 1785년부터는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프랑스 라자 리스트 회 신부 일행이 북당에 거처하면서 선교에 힘썼다.
그러나 서당의 이탈리아와 북당의 프랑스 선교사들 간은 흠천감의 실권과 산둥 성의 포교권을 장악하려는 남당·동당의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극심한 박해로 인해 1819년에 프랑스라 트자 리스트 회라 미모(Lamiot) 신부가 마카오로 추방되었고, 1826년에 세라(Serra) 신부마저 마카오로 떠나면서 북당은 폐쇄되었다. 1844년 황포 조약의 종결과 동시에 재건되었다가 1951년 중국 공산화 이후 다시 폐쇄되었다. 현재 북당 성당에서는 일요일 아침과 저녁 4차례에 걸쳐 미사가 봉헌되고, 신자 외에 외국인들에게도 개방된다. 역사가 오래되어서 고색창연하고, 건 평면적은 좁지만 성당 전면의 고딕 양식이 눈길을 끈다.
선무문 천주당 宣武門 天主堂 [남당 南堂]
남당으로 알려진 선무문 천주당은 북경의 천주당 중 가장 먼저 건립된 천주당이다.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과 가까웠기 때문에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이 빈번하여 서구 문명을 배우고 받아들이게 된 곳이다.
남당 천주당으로도 불리는 선무문 천주당은지하철 2호선 선무문역에서 하차하여 5분거리에있다.예수회의 마테오 리치 (MatteoRicci, 利瑪竇,1552~1610) 신부가 명만력33년 (1605)년에 선무문안 (자금성밖의 남서쪽)에 건립한 성당이다. 현존 건물 가운데는 가장 오래된 교당이다. 청건륭제 40년(1775)에 불탔으나 다음해 중건됐다.1900년 의화단 운동때 다시 훼손됐는데,청광서제 30년(1904년)에 다시 건축됐다. 홍대용과 박지원 등의 연행록에는 이들이 방문한 곳이 서당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실은 남당이다.
건륭 때에 통미가 경당(通微佳境堂)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활동했던 곳이며, 소현세자와 교류하던 아담 샬 신부가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남다 이천 주당은 김창업의《연행 일기》(燕行日記) 이후 연경을 방문하는 사신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홍대용은 1766년 1월 9일 남당을 방문하여 당시 남당의 선교사였던 할러 슈타인(AugustvonHallerstein, 劉松齡)과 고가 이슬(AntonGogeisl, 鮑友官) 신부들을 만났다.
그는 모두 네 차례 천주당을 방문하였는데, 천 주당에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고, 생전 처음 보는 파이프오르간의 제도를 살피고 연주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실학자들은 남당을 찾아 서학을 접하면서 그 사유의 지평을 넓히게 되었다. 나중에 연행에 오른 박지원 역시 천주당을 찾은 감격을《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술회하고 있다.
천주당 바람벽과 천장에 그려져있는 구름과 인물들은“번개처럼 번쩍이면서 먼저 내 눈을 뽑을 뜻하는 그 무엇이 있었고, 꼭 숨을 쉬고 꿈틀거리는 듯 음양의 향배가 서로 어울려 저절로 밝고 어두운 데를 나타내고 있었다."라고 하여 서양의 화법에 대해 감탄하기도 하였다. 남당은 중국의 불교사원 건축양식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융합된 건물이다. 이성당은 이탈리아의 대성당과 비슷한 반원아치형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고 전체적으로 암회색의 벽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고졸하고 소박함을 더해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당의 좌우에 비석이 남아있으나 많이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사료에 의하면 동쪽 비는 청나라 순치 14년(1657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총 세조, 순치 황제가 친히 남당을 위해 내린 어제 천주당 비기(御制天主堂碑記)이다. 주요 내용은 순치 황제가 역법을 중시하여 아담 샬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 종교 신앙을 찬양하여 관직과 칭호를 주어 고무하였다는 내용이다. 서쪽 비의 비문은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의 사적과 성당 건립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서당 천주당(西堂 天主堂) [서직문 천주당(西直門 天主堂)]
서당 천주당(西堂 天主堂)은 라자리스트희[遣使會]의 페드리니(Pedrini, 德理格) 신부가 옹정제(雍正帝) 때인 1725년에 서직문(西直門) 대로에 있던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건립한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 속편>에서 “근대의 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적었다.
서양화가 동양으로 처음 전해진 것은 중국 명 말에 예수회 신부가 북경에 들어가서 천주교를 선포하며 예수의 기적도와 성모상 그림을 내 보인데서 비롯하였다. 조선인이 서양의 화풍을 알게 된 것도 그로 인해서다. 기록을 빌리면, 병자호란(1636) 직후 인질로 청국에 연행되었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서양인 신부 아담 샬(Adam Shall)과 친밀히 접촉하다가 1645년 초에 귀국하게 될 적에 그 신부에게서 천주교 교리책을 포함한 서학 서적과 함께 천주상 그림 한폭을 얻어 갖고 왔는데 아마 그것이 서양화가 조선에 들어온 처음일 듯하다.
또 당시 북경의 동서남북 네 곳에 세워져 있던 천주당 중의 서당은 특히 조선의 사신 일행이 즐겨 찾아가 서양식 창벽화(스테인드 글라스) 등의 신기함에 놀라곤 하였다. 그러한 그림은 진작부터 여러 관람자의 기행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다가 1780년에 북경에 다녀온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 ‘양화’ 항목으로 그 천주당에서 본 희한한 실상이 소상히 기술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양화를 관심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북경에서 전래된 양화의 실물을 보는 일도 있게 되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양화의 유채 재료와 사실적 색상을 설명한 항목까지 보게 되었다.
동당 천주당(東堂 天主堂) [왕부정 천주당(王府井 天主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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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당 천주당(東堂 天主堂)에 관한 기록은 홍대용의 <연기(燕記)>에 소상하다. 동당은 몽고관(蒙古館)에서 북옥하교(北玉河橋)를 지나 자금성(紫禁城)을 따라 가다가 보이는 기이한 기와 지붕을 인 서양식 집이다. 지금의 왕부정 대가(王府井大街) 74호에 있다. 북경 4대 천주교당 가운데 하나인 동당은 명말 2명의 선교사가 세웠으며, 청조가 북경에 들어올 때 훼손됐다가 순치(順治) 12년(1655)에 이 땅을 하사했다. 이때 남당과 같이 건립됐지만 가경(嘉慶) 12년(1807년)에 화재로 폐허가 됐는데, 1884년에 로마식으로 다시 건립됐다. 의화단의 난 때 다시 불 탔으나, 1904년 배상 형식으로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공동으로 중건하였다.
천주당을 방문한 연행사들은 원근법을 이용한 서양 그림의 사실적인 화법에 감탄하곤 한다. 홍대용은 북쪽 벽에 그려진 천주의 화상(畵像)이 모발이 무성하여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여, 원근법을 사용한 서양 그림의 입체감에 탄복하였다. 동당 서쪽에는 자명종루(自鳴鐘樓)가 있고, 누각 아래에는 해시계[일귀석(日晷石)] 한 쌍이 있다. 서쪽으로 난 문밖으로 두어 길 되는 대(臺)가 있었는데, 이를 관성대(觀星臺)라 하였다. 대 위에는 집 셋을 세워 놓았고, 가운데 집에 혼의(渾儀)ㆍ망원경 등 여러 가지 의기들을 저장하여 두었다.
대 아래 넓이가 수십 묘(畝) 되는 뜰에는 벽돌을 쌓아 길이가 1장쯤 되는 기둥을 만들어 두었는데, 위에는 열십자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런 것이 무려 수백 개가 뜰에 널려 있었으니, 대개 봄 ?여름에는 위로 포도 덩굴이 올라가도록 횃대를 놓아 둔 것이다. 기둥 옆에 군데군데 무덤처럼 흙을 모아 둔 것은 포도를 저장하는 곳이다.
뜰 동쪽에 집이 두어 칸 서 있고 가운데에는 우물이 있었다. 우물 위에 두레박틀을 만들어 두었고, 옆에는 치목(齒木)을 가로질러서 톱니 바퀴가 맷돌처럼 고르게 돌아가게 하였다. 벽에는 버드나무 물통이 수십 개나 매달려 있었다. 또한 봄여름에 물을 길어 포도에 대는데, 기계 바퀴가 한 번 돌면 수십 개의 두레박이 차례차례로 물을 끌어 올리기 때문에 사람이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물은 도랑에 고루 퍼져 뜰에 가득 차게 된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포도를 힘들여 가꾸는 것은 술을 빚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