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부 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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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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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 소팔가자 성당 소팔가자란 말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소팔가자란 말 자체가 명사인가 아니면 지명인가 다소 어리 둥절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소팔가자(小八家子)란 중국 장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그만 소도시의 이름인데 여덟 가구가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루었다는 데서 유래가 되었다. 이 소팔가자는 우리 한국인들과 매우 친근한 역사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은 것이 그것이다. 1884년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서 소팔가자를 떠나서 한 달 여 동안 도보로 훈춘이란 곳에 도착, 두만강을 건너 개시(開市)기간을 이용하여 경원에서 조선교회의 밀사들과 만났다. 그러나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이 의주길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2개월 동안 그는 왕복 2천리 길을 걸었던 것이다. 육지와 바다에서 겪은 그의 여행은 그이 병약한 몸을 강건하게 만들어주었다.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함께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부제품을 받았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사제품을 받기에는 연령이 미달이 되었던 것이다.그해 12월 말에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함께 김방지거라는 안내원이자 교우를 만나기 위해서 소팔가자를 출발해서 그 이듬해 1월 1일 변문에서 방지거를 만났다. 그리고 조선에서 나온 교우들과 접촉을 가졌다.그러나 선교사의 조선 입국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김부제(김대건)만 입국시 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가서 김부제의 소식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김부제는 천신만고 끝에 1월 15일 서울로 들어 오는데 성공을 했다. 소팔가자는 김대건 신부에게는 비단 부제품을 받았다는 곳으로서의 중요성보다도 그를 있게 만든 고향과 같은 곳이다. 거기서 그는 페레올주교를 만났고 사제가 되기까지의 모든 역정을 겪으면서 신학 공부를 한 토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지난 1997년에 작성이 된 소팔가자 소사(小史)에서도 소팔가자와 천주교와의 인연과 김대건 신부에 대한 자세한 관계를 항목으로 만들어 놓았다. 만주 교구의 베롤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은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에게는 잊지 못할 은인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