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해 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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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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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항 천주당 성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17일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사제품을 받은 곳이다. 원래 김가항천주당은 현재의 성당에서 약 1킬로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2001년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철거되었다. 철거된 자재의 일부는 은이 공소로 옮겨졌으며, 이 잔재를 이용하여 은이공소에 김가항성당을 축소 복원하는 형태로 재건할 계획이다. 중국 상해에 위치한 김가항 성당은 17세기 명나라 숙종(1628~1643) 때 중국 화동 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건립된 후 1841년에는 남경 교구 주교좌성당으로 지정됐었다. 당시 금가항은 특히 김 씨 성을 가진 교우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며, 황포강과 연결되는 수로가 잘 발달하여 교통의 요충지로서, 특히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안전 등을 이유로 주 활동 거점으로 삼았다. 1845년 8월 17일 조선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주례한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식에서는 다블뤼 신부를 비롯한 서양 신부 4명과 중국신부 1명이 미사를 공동 집전했고, 성당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만큼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했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 수품을 축하하기 위해 수없이 몰려든 신자들의 무리 중에는 그해 4월 30일 김대건 부제와 함께 제물포를 떠나 라파엘 호로 상해로 온 조선인 신자 11명도 있었다. 이들 조선인 신자11명 중에는 《기해일기》를 편찬한 성현석문가롤로와 한국인 첫영세자 이승훈의 손자이며 조선 제2대교구장 앵베르 범주교의 복사였던 순교자 이재의(토마스), 임치화, 노원익, 임성실, 김인원등이 있었다.사제 서품식 전에 김대건 부제와 함께 김부제의 통역으로 고틀랑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본 11명의 조선인 신자들은 이날 서품식에서 새 사제 김신부가 직접 축성한 성체와 성혈을 영하면서 목이 잠기는 기쁨을 맛보았을것이다. 1937년 새 성당은 일본군의 포화에 의해 파괴되었고, 1949년 1000여 명 수용이 가능한 고딕식 건축으로 재건되었으나 국민당 군대에 의해 재차 파괴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부속 소성당으로 사용되던, 김대건 신부 가사제품을 받은 건물은 2001년까지 보존되었었다. 이곳에 한국교회 순례자들을 위해 1993년 성당의 부속건물인 사제관 1층을 개조하여 김대건 신부 기념관으로 꾸미고 1991년 원주교구장 김지석 야고보 주교와 동창 사제들이 기증한 성인의 성해(척추뼈) 등을 모셔놓았다. 이후 1993년 한중 양국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성당을 찾는 한국순례자들에게 상해의 김가항 성당은 중국 내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순례지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서산성당 She Shan Basilica 쉐산 언덕에 있는 첫 번째 교회는 1863년에 지어졌다. 타이핑 반란 때 예수회 선교사들은 언덕의 남쪽 비탈에 있는 땅을 사들였다. 버려진 한 불교 수도원이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남아있는 건물들은 철거되었고, 선교사들을 위한 거처로 작은 건물 한 채와 작은 예배당 한 채가 지어졌다. 언덕의 정상(미륵불이 서 있던 곳)에는 성모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작은 정자가 있었다. 1870년 6월 톈진 지역의 소요사태로 성당이 불타버렸다. 상해 예수회는 성모님 동상에서 기도했고, 성모님을 보호하고 그 명예를 되돌리기 위해 성당을 세우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1871년 프랑스 예수회 형제 레옹 마리오 (1830~1902)가 설계하며 건축이 시작되었다. 상해에서 나무가 선적되었고, 푸젠성에서 돌을 구입했다. 모든 재료는 손으로 꼭지점까지 포팅해야 했다. 성당은 2년 후에 완공되었다. 이 최초의 성당은 십자가 형태였으며, 중국과 서양 건축 양식의 특징을 통합하였다. 당묘교성당 2001년 3월 금가항 성당이 철거되면서 성당에 모셔져 있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척추뼈)와 한국 천주교회에서 보낸 기념비가 있는 성당이다. 김대건 성인의 성해가 안치된 당묘교 성당 제대에는 금가항 성당 기념관에 있던 김 신부의 초상화와 석고상, 현판이 그대로 옮겨져 장식돼 있어 당묘교 성당측의 깊은 배려가 엿보이기도 한다. 성해는 김대건 신부 석고상과 함께 유리 감실에 봉인된채 현시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