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빠도기아 현-네브쉐히르(Nevsehir) 성서명 - 가빠도기아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가빠도기아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280km 떨어진 네브쉐히르 도시 일대의 광활한 고원지대이다. 이 지역은 원래 사암지대였으나 신생대 3기 화산으로 인하여 화산재가 응회암이라는 암석으로 굳어졌고, 오랫동안 지각 변동과 풍화작용으로 생겨난 원추형의 현상은 약 800㎦를 이루고 있다. 이곳의 지하 동굴은 기원전 1,200년 전부터 서기 17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서기 14-37년 재위)가 가빠도기아 왕국을 멸하고 로마 제국 영토에 편입할 때까지 수많은 왕국 교체과정에서 전쟁 패잔병들이 소규모로 토굴을 파고 은신해 살면서 시작됐다. 그 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심해지자 소아시아 반도를 비롯한 각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몰려와 지하동굴에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괴뢰메 계곡
괴뢰메 계곡은 천연의 자연 조각품으로 환상적이다. 이곳은 지상 바위 동굴 속에 프레스코와 성화들이 교회마다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 많이 파괴되었으나 토카르트교회 같은 곳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어두운 교회 천정과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활과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이 그려져 있다.
대표적인 동굴 성당은 바실리우스 성당(작은 성당). 엘말러 킬리세(사과 성당). 성녀 바르바라 성당, 열라늘러 킬리세(뱀성당), 카란르크 킬리세(어두운 성당), 크즐라르 마나스트러(수녀원), 엘나자르 성당등이 있다. 괴레메는 그리스 중부의 수도원 집성촌 메테오라, 아토스와 더불어 가장 인상 깊은 수도원이 있다. 1923년 터키와 그리스가 맺은 조약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수도자들은 모두 그리스로 이주했다. 교회 내부는 예수님께서 갈릴리호수에서 어부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시는 모습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가시는 모습, 또한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님등이 그려져 있다. 이 성화는 10-13세기에 그린 것들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또한 십자가를 메고 로마 군인들에게 끌려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성모 마리아상 등의 성화들이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쿠유와 카이막카르 지하도시의 형태는 비슷하다.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대형 지하도시는 현재 8층까지 내려갈 수 있다. 피난민이 늘어날수록 더 큰 공간의 넓이가 필요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계속 파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게 됐다. 지하도시에는 밖에서 추수한 곡식들뿐만 아니라 사료들을 저장했고, 비상시 음료수를 위해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포도주를 놓아둔 흔적도 있다. 땅속 깊이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또한 이것을 지하공기를 맑게 해 주는 통풍장치로 이용하였다.
파묵깔레 (성서명 : 히에라볼리)
산화칼슘이 주성분인 온천수가 언덕 꼭대기에서 솟아남으로 수 전 년을 두고 흘러내린 온천수는 산비탈을 온통 순백의 바위로 뒤덮게 했으며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천연 욕조를 만들어 놓아 이 세상 다른 곳에서 볼수 없는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또 한쪽의 산자락에서는 유황온천이 흘러 온천수를 이용한 질병 치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최초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한 군주는 페르가뭄 왕국의 유메네스로서 페르가뭄의 창건자 델레포스(Telephos)의 아내 히에라를 기념하기 위해 이 도시를 히에라폴리스라고 명명했으며 聖市(성시)라는 의미를 갖는다. 기원전 133년에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로마 문명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후 티베리아 횡저 시대인 AD 17년에 지진에 의해 대파되었으나 복구되어 2-3세기경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바둑판 모양의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복구된 이 도시는 수많은 각종 신전들이 건립되어 있어서 ”신전의 전시관”이 라 불릴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 이 시기에 지어졌다. 히에라폴리스의 주산업은 카페트 및 직조를 주로 하는 양모 산업과 꽃을 기르는 원예사업이 중심이었고 특히 석공예가 상당히 활발해서 섬세한 돌조각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있다. 인근 지역에는 대리석 산지가 있어서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의 알록달록한 대리석 기둥은 이곳에서 생산된 것이다. 다시 6세기부터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지금의 데니즈리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다.
유적으로는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원형극장으로 2세기 하드리안 황제때 지어진 것으로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또한 역사상 중요한 것은 필립보 사도의 순교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사람인 필립보가 이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사건이 생겼는데 후에 그 무덤 위에 세운 교회이다. 이 도시의 북쪽 끝에 수 천개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소아시아 반도에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르소

사도 바오로의 탄생지 다르소는 소아시아(터키) 남동쪽 해안 길리기야 관구에 있는 도시이며, 길리기야 페디아스의 주요 수도이다. 기원전 323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 대왕의 막료로서 시리야에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운 셀레우코스 니카토르(5eleukos Nikator)가 다르소 일대를 차지했다. 그래서 다르소는 자연스레 동서문화와 언어의 교차지가 되었다. (기원전 333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르소를 관통하는 치드누스강에서 목욕하다가 익사 할 번한 일화도 있다.) 기원전 64년 이 곳은 로마에 합병되어, 기원전 57년에는 길리기야(Cilicia)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으며 기원전 50년에는 로마의 달변가 키케로(Cicero)가 길리기야 총독으로 이곳에 부임했다. 기원전 41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장군이 내방해 면세 혜택을 베풀었는데. 이때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아름다운 여신 비너스로 분장하고 지드누스강으로 배를 타고 와서 안토니우스 장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바오로는 다르소에서 태어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필립 35) 개심 후 삼년이 지난 36년경에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를 만나본 다음(갈라 1,17-19)고향 다르소로 돌아가 약8년 동안 지냈다(사도 9,3) 44년경 그는 시리아와 안티오키아 교회의 일을 돌보던 바르나바의 초빙을 받아 안티오키아로 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의 신도들과 함께 설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사도 11,25-26) 에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 경)도 바오로는 고향 다르소를 거쳐 갔음에 틀림없다.
이 여행 경로를 보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타우루스(Taurus) 산맥을 넘어 제1차 전도지역(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을 다시 찾아본 다음, 훨씬 북쪽에 자리 잡은 갈라디아 지방으로 갔다. 그런데 그 험준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자면 별 수 없이 다르소를 관통하는 지드누스(Cydnus,지금의 타르수스 수유)강을 따라 협곡(길리기야 관문)을 지나거나 다르소를 지나 실리프케 (Silifke) 항구에서 칼리카드누스(Calycadnus,지금의 픽수)강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러니 어느 경우에 그의 고향 땅 다르소를 거치게 마련이었다. 제3차 전도여행 때(53 -58 년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바오로는 세 차례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바오로가 로마의 파견대장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혀 ”나는 길리기야의 다르소출신 유대인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 라고 밝혔다(사도 21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