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그리스 -소아시아 일곱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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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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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과 묵시록의 일곱교회 요한 묵시록은 전체성서 증 마지막 책으로서 요한복음, 요한 1.2.3서와 함께 요한 공동체에서 쓰여진 성서로, 요한계 문헌으로 분류된다. 사도 요한이 집필했다는 교회 전승에 따라 요한 묵시록이라 불리게 되었지만 요한계 문헌이 전해 내려온 공동체에 속한 서로 다른 저자들이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요한 묵시록은 문체나 성격이 복음서나 서간들과 는 현저하게 차이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묵시록을 집필을 했다기보다는 바르나바의 동역자인 요한 마르코나 원로 요한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요한이라는 사람 내지 사도 요한의 이름을 빌린 익명의 저자가 집필했을 거라고 보고 있다. 요한 묵시록은 도미티야누스(81-96)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집필 배경은 로마 제국의 도미티야누스 황제가 스스로 ’신이요 황제'라 자처하면서,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곳곳에 황제 신전을 지어 참배토록 강요하자,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대대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당하기도 하고, 순교에 대한 두려움으로 배교하거나 신앙이 흔들리자, 이런 현상을 주목해온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환시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받는 어린양임을 일깨움으로써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북돋우고자 에페소일대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스마르냐 (Smyma)-현.이즈마르(IZIIJUR) 이즈미르는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은 터키 제3의 도시이다. 또한 서사시인 호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에페소, 파묵깔레, 셀주크 등으로 연결되는 에게해 연안의 교통 요충지이며,고대에는 스미르나로 불리며 무역항구로 발전하였다. 1922년에는 그리스와 벌였던 전쟁에서 화재로 파괴되고 말았으나 바로 재건되어 지금과 같이 아름답고 현대적인 도시로 바뀌었다. B.C3,000년부터 형성된 항구도시로서 알렉산더대왕이 이곳에 주둔하였고, 산위에 성채를 건설하였다. 스미나르는 기원전 27년 로마와 합병되면서 크게 번성하였고 항구 상업도시로서 해외 거주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쓸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초대교회를 핍박하였고(계 2:9-10) ‘유대인들의 훼방’에 관한 언급을 이해할 수 있다. 묵시록의 저자는 스미나르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박해를 당하리라고 예고하면서 그럴 때일수록 신앙에 충실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훈계를 했다. 라오디게아(Laodicea)-現라오디케이다 (laodikeia) 리커스 계곡에 위치한 리커스 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알렉산더가 죽은 후 시리아 셀레우코스(5eleucid)왕가의 안티오쿠스2세(Antiochus-기원전 261년-252년 재위)가 그의 부인 Laodicea의 이름을 따서 도시이름을 라오디게아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폴리스의 온천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 요한 묵시록의 작가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묵시 313-22) 이곳 교우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 여행 중(53년-58년경) 에페소에서 27개월 가까이 머물때 그의 제자 골로사이 출신 에바프라는 에페소에서 동쪽으로 450여리 떨어진 곳에 골로사이 교회(골로16-1)와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게아 교회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비잔틴제국은 13세기까지 이곳을 방어하다가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710년과 1899년의 대지진때 파괴된 이곳을 1961년-1963년 캐나다 퀘벡시의 라빌대학교 고고학팀의 발굴 작업으로, 로마식 야외 운동장 (5tadium)과 두개의 큰 야외 원형경기장터가 발견되었다. 아직도 유적 부분이 땅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필라델피아(philadelphia)-現아라쉐헤르(Alasehir) 사르디스에서 동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옛날의 필라델피아, 지금의 아라쉐히르 읍내가 있다.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도께서는 일곱교회 가운데서 오직 스미나르 교회와 더불어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시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오히려 칭잔하셨다. 14세기경 주변이 전부 오스만 투르크군에게 점령당했으나 필라델피아만은 그리스도교 도시로 자체방어를 하더니 1379 년 비잔틴 황제 요한5세와 오스만 투르크 슐탄 뮤라트1세간에 정치적 거래로 오스만저제국에 편입되었다. B.C159-138 베르가모의 왕 Attalus 2세,Phi ladelphus에 의해서 이 도시가 세워졌다. 그의 이름을 따서 필라델피아로 올리게 되었다. 이곳은 사르디스. 베르가모.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산업이며, 농산물로는 포도를 재배하였다.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에서는 소아시아내의 300여개 교회의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공급하였기 때문에 형제사랑을 실천한 교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A.D 17년과 23년에 큰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가 대파되었다. 오늘날 비잔틴 시대에 세운 교회터가 남아 있는데 3개의 큰 기둥과 거기에 그려진 벽화가 비바람에 마모되어 가고 있다. 사르디스(Sardis)-現샤르트(Sart) 티아디라(Thyatira)-現 아키샤르 Akhisar) 베르가모와 사르디스를 잊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B.C300년에 5eleucus 1세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이며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사도행전 16 : 11-15 에 의하면 사도 바오로는 제2차 전도 여행 때 필립비에서 맨 먼저 입교한 사람이 바로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사 리디아라는 여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티아디라는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했다. 이 비단은 꼭두서니 뿌리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고가품이어서 부호들이나 입을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680년경의 리디아 인들이 티아디라와 사르티스 일대에 리디아왕국을 건설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기원전 190년 베르가모 왕국이 이곳을 통치하기까지 여러 왕국들이 번갈아가며 이곳을 점령했다. 베르가모(pergamum)-現베르가마 (Bergama) 묵시록 2장 12-17절에 나오는 이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선사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막료 러시마쿠스 장군이 베르가모 일대를 통치하다가 기원전 281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러시마쿠스의 부하 를레타리우스가 베르가모를 수도로 삼아 베르가모왕국을 세웠다. 베르가모는 독립된 왕국 의 중심이 되어 높은 문화를 이루었다. 기원전 133년 마지막 왕 앗달로스 3세가 죽으면서 왕국을 로마공화국에 헌납하게되고, 베르가모는 아시아 속주에 편입하게 되었다. 베르가모에 가면 시가지 동북쪽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천년요새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베르가모 왕궁, 멀리서 식수를 끌어들여 저장한 저수장, (B.C197-B.C 159)가 지은 큰 도서관이 있고, 가파른 언덕배기에 만들어진 노천극장을 볼 수 있다. 또 이곳 시가지 서쪽 외곽지대에는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117 -138년 재위)때 지은 방대한 종합의료시설이 있다. 이곳은 B.C 4세기부터 A.D 400년대까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로마황제 Caracalla(A.D 211-217)도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황제는 거의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 원형극장을 세워주었다. 이곳의 치료방법은 약물요법 이외에 정신요법, 일광욕, 운동요법, 맨발 걷기 요법, 음악요법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로마황제 도미시아누스(81-96년 재위)의 신전과 함께 묵시록 2장 13절에서 말하는 ‘사탄의 권좌’로 추정되는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이곳에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축물은 밑으로 5elinus강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본래 희랍-이집트 신인 5erapis를 위한 신전이었는데 비잔틴시대에 내벽을 쌓아 성당으로 개조하여 사도 요한이 거둔 성과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이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