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그리스 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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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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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사원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며, 사원의 내부가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습니다. 우뚝 서 있는 첨탑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도가 지키는 1일 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사원 앞의 정원에는 언제나 화사한 꽃이 피어 있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합니다.
코라 구세주 성당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성박에 세워졌습니다. '교외', 도시 근교의 '시골' 뜻하는 그리스어 Chora의 발음이 변하여 카리예(Kariye)로 불리게 되었고, 현재는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아시아 대륙 끝 위스크 다르에 위치한 코라 성당은 558년의 대지진때 완전히 파괴되어 유스티아누스 황제(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527-565년)가 개축하였습니다. 현재 성당의 원형은 비잔틴 왕조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소(Alexios,Komnenos, 1081-1118)의 장모 마리아 듀카스(Maria Dukas)에 의해 1077-1081년에 세워졌습니다. 그 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총리 테오도레 메토키데스(Theodore Metochites)가 1315-1321년 수도원을 수리하고 현관과 부속경당을 증축하여 내부의 천정과 벽에 성경의 내용을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장식했습니다. 특히 테오도레 메토키데스가 예수님께 성당을 바치는 모자이크도 남아 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된 이후 탄압으로 파괴되고 개축되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 시난이 성당의 중력을 지지할 목적으로 16세기에 네 개의 미나레(Minaret, 이슬람 사원 첨탑)를 외부에 세웠는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당에는 중앙(Naos)의 메인 돔을 포함해 5개의 돔이 있고 성당 중앙(Naos)은 내부 나르텍스(Narthex, 출입문에서 성당 중앙으로 연결되는 현관 홀)와 연결됩니다. 중앙 문을 통과하면 내부 나르텍스 (Esonarhex, 성전 중앙으로 들어가는 내부 입구, 폭4m, 길이18m)가 있는데 구조적으로 내부 나르텍스는 창을 만들 수 없어 볼트 (Volt, 비닐하우스 형태) 형 천장에 두개의 돔을 만들어 돔과 볼트 사이에 채광창을 만들었습니다. 이 채광창을 통해 돔 천장의 황금빛 모자이크에 반사되는 빛은 경외감과 신비감을 자아냅니다. 외부 나르텍스(Exonarthex, 전체 건물 외부 입구, 폭4m, 길이23m)천장에는 모자이크로 된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슬람 정복 이후 성당 내부에 있던 성경의 중요 내용을 그린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은 회반죽을 덮여 이슬람 사원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었으나 1948년 이후 복원되어 건립 당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부속경당의 <최후의 심판>, <부활> 등 모자이크와 벽화는 비잔틴 후기의 명작으로 순례자들의 경외감을 자아냅니다.
에페소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자료는 고대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얻어진 수천 점의 비문에 의존하지만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알 수 없습니다. 역사에서 에페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힛타이트 성경의 햇족속 비문에서인데 그 비문에는 Apasas라고 불리웠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기원후 1세기에 에페소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중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기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바오로는 그의 3자 전도 여행 때 에페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빌리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64년 사도 바오로가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페소의 그리스도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베르가모, 스미나르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몰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 모섬으로 유배를 당해. 이곳에서 요한 계시록을 썼다. 로마 황제 도미티안이 피살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페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페소에 묻혔으며, 비잔틴제국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에 들어와 에페소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키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에페소는 지진으로 황폐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문은 요한의 교회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대부분을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야수와 전사들의 결투를 즐겼던 3-4세기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경기장에서 야수들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에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 경기장으로 달려가서 그 대리석들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은 의도는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4세기경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페소에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자, 그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립되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안황제가(527-565)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의 교회로 증축시켰다. 교회의 심장부인 본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이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31년 이곳에서 제3차 공의회가 열려 그리스도교 교리를 토론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안티오키야 교회에 있을 때부터 동정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약 200명의 권위자들이 3개월간 토론끝에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는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이 회의록에는 성모 마리아가 에페소에 왔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묻혔다는 문구가 남아 있어서 사실을 확인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죽기 전 요한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나이다’ 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리켜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요한복음 19장26-27절) 그러하여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로 오게 되며 3차 공의회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마리아에게 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 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져 가고 폐허가 되어 찾을 길이 없었다. 1878년 캐더린(Catherine)이라고 하는 독일수녀가 물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속에 마리아의 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수녀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한 번도 떠난 일이 없었으므로 1891년 나자렛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집터 모양은 캐더린이 계시를 받아 기록한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1961년 교황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