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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02 10:55
베트남 중남부-라방,후에,짜끼우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라방성지

베트남은 불교와 유교를 중요시하던 나라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많이 받았다.

1798년 꽝지성 하이푸 라방의 신자들이 박해의 위험과 질병, 배고품의 고통 중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데 베트남 여인의 복장을 하고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이 Banian Tree(반얀트리, 보리수나무)에 발현하시어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 허브를 이용하여 질병을 치유하고 야생식물로 배고품도 견딜 수 있도록 알려 주셨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용기를 내어라.

너희가 무엇을 나에게 청하였어도 나는 너의 기도를 이미 들어 허락하였으며, 앞으로 누구든지 이곳에서 나에게 청하는 모든 이의 기도를 들어 줄 것이다." 라방 성모님 메시지이다.

 

1820년 경당 건축, 1885년 파괴되고 1901년 가스파르 주교에 의해 성당 건축, 가스파르 주교는 라방 성모님을 베트남 신자들의 수호자로 선포하셨다. 1925~1928년 붉은 벽돌로 건축한 라방 대성당은 1972년 베트남 내전으로 폭파되고 지금은 종탑 부분만 남아 있다. 1959년 성 요한 23세 교황은 전 세계 신자들에게 라방 성모님 발현 순례 성지로 선포하셨다.

 

짜끼우 성당

베트남 성지순례를 오는 순례객이 꼭 방문하는 짜끼우 성당은 베트남 중부에 있는 항구도시 다낭에서 서남쪽으로 40, 미선 유적지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859월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 나타나셨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함응이왕이 신자들을 체포하려고 군사를 보내자 이를 피해 짜끼우성당에 몰려든 신자들을 보호하려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곳입니다.

1885“Binh Tay, Sat Ta 프랑스인을 진압하고 칼로 죽이자라는 운동이 일어나자 무기로 무장한 약 8.000명의 껀왕군이 짜끼우 교구를 포위하였습니다. 교인들은 두려움에 떨며 짜끼우 성당에 모여 기도하며 강력하게 저항 하였습니다. 이때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성당 지붕에 나타나 성당을 향해 공격해 오던 군사들의 창과 화살을 막아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군사들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99일부터 사흘간 발현한 성모 마리아를 정작 성당 안에 있던 신자들은 보지 못했고바깥에서 이를 지켜본 주민들이 군사들이 물러난 뒤 신자들에게 알려줌으로써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알게 됐었다고 합니다. 이 기적은 당시 프랑스인 브뤼에 주임신부가 프랑스교회에 보고함에 따라 널리 알려졌습니다.

1889년부터 1892년까지 짜끼우 교인들은 성당을 재건하였습니다. 오늘날 짜끼우성당은 성모 발현 당시 성당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단층 삼각 지붕이었지만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정면 양쪽 기둥 두개만 살려둔 채 2층으로 증축하였습니다. 1층은 강당으로2층은 성당으로 사용 중인데 성당 제대에는 성모 발현 당시 성당에 있었던 성모상과 감실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건물 원형은 크게 달라졌지만 성모상과 감실은 중요한 역사적 유물이기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연하늘색으로 채색된 성당 내부는 말끔하게 정돈돼 있습니다.

[출처] 베트남 성지순례-짜끼우성당 (Tra Kieu)|작성자 라방지기

 

복자 안드레 푸엔성당

1625년에 태어나서 19살인 1644년에 첫 순교자가 된 안드레아 푸엔의 유해를 모신 성당입니다. 순교를 당한 장소에 이 성당을 건축 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 푸엔은 164217세의 어린 나이로 외방 전교회 소속의 로데스 신부님이 설립한 교리교사 양성소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2년을 수학하던 16447월 응우옌 왕조가 국내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금지 시켰습니다. 이 시기 정부군의 감시가 심해지자 교리교사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때 그리스도교를 추종하는 자들은 가혹하게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목민관은 안드레 푸엔과 함께 교리 수학을 하는 이그나시오를 잡아 오라고 명령 하였습니다. 그의 집에 도착한 정부군은 이그나시오를 찾을수 없자 그 집에서 있던 안드레 푸엔을 줄로 묶어 관으로 연행하게 됩니다.

1644 7 25 일 오후에 정부군에 잡혀 그는 목민관 앞에 인도 됩니다. 정부군은 이그나시오를 찾을 수 없어 그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을 잡아 온 것을 목민관에게 말합니다.

목민관은 안드레 푸엔에게 "미친 종교를 버리고 믿음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며 여러가지 형벌을 가합니다.” 그러나 젊은 안드레아는 모든 고통을 참으며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목민관에게 자신은 어떠한 형벌도 기꺼이 받아 들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내 믿음은 더 굳건해 진다는 걸 나는 확신한다.”라고 목민관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에 화가난 목민관은 자신의 위협 앞에서도 19살 어린 안드레아가 두려워 하지 않는걸 보고 목에 칼을 씌우고 옥에 가두라고 명령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644 7 26 일 아침에 군인들은 안드레아의 목에 칼을 씌운체로 사람들이 많은 혼잡한 시장거리를 가로 지르게 하여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사형판결을 내렸 습니다.

 

그날 오후 5 시에 안드레아의 처형이 집행 되었습니다. 안드레아의 스승인 로데스 신부가 안드레아의 자리 밑에 천을 펴고 그의 피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정신과 같아지기 위해 자신의 피를 땅에 흠뻑 뿌리기를 원했습니다.

곧 안드레아의 사형 집행이 시작 되자 한 군인이 긴창으로 그의 왼쪽 늑골을 깊이 찔렀고 피를 흘리는 그의 목을 자르려고 또다른 군인이 긴칼을 들고 왔을 때 그는 "예수님"을 외쳤습니다.

최후의 숨까지 어린 안드레아는 그리스도가 사랑을 위해 희생 제물로 목숨을 받친 것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때 안드레아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말고 항상 신앙을 굳게 지켜야 된다는 마음을 깊이 상기 시켰습니다.

안드레아 푸엔의 (뼈와 머리카락)의 유해는 안드레아 푸엔 성당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유해(두개골)는 마카오에 보관 되어 있습니다.

 

다낭대성당

다낭 대성당은 베트남 중부 다낭 대교구의 성당으로, 다낭 시 쩐푸 거리 156에 위치해 있다. 이 성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 다낭에 지어진 유일한 성당이다. 이 교회는 19232월 현재의 쩐푸 거리의 빈 땅에서 사제 발레가 설계하고 건축했다.

대성당은 치솟는 선과 크라운 아치의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성당 안에는 서구 교회를 모티브로 한 성서의 사건을 그린 삽화가 있다. 피뢰침이 있는 교회의 지붕에는 바람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는 합금으로 만든 회색 닭 조각상이 있다. 그래서 이 성당을 수닭성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푸캄 후에 대교구 주교좌성당

Ngo Viet Thu라는 베트남 건축사의 작품 이다. 오랜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성당은 3분의 주교님의 관리를 받았다.

첫번째 Ngo Dinh Thuc 총주교, 다음에 Nguyen Kim Dien 총주교, 마지막은 Nguyen Nhu The 총주교 였다.

성당을 완공 하기까지 총 40년의 오랜 시간이 걸려 지금의 멋진 Hue 대성당의 상징이 되고 있다.

 

홍가이성당

1933년 완공된 하롱베이 지역의 가장 큰 성당으로 베트남 전쟁때 폭탄의 피해로 많이 파괴되었다가 1990년대에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웅장하게 복원된 하롱베이지역 신앙공동체의 상징이자 중심인 성당. 언덕꼭대기 주택가 중심에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고 주변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생애와 관련된 조각품이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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