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 순교성지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던 곳으로,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프랑스인 사제와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렸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졌다. 1846년 병오박해 때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렸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한옥 양식으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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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새남터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공식 처형장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 중 신원이 확인된 분만도 1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44위가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행사를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단일 순교지로는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곳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추진한 124위 초기 순교자와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시복절차에 강완숙 골룸바를 비롯한 서소문 순교자 27위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었고, 이들은 모두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중림동약현 성당(옛 약현 성당)은 1891년 서울에 두 번째 본당으로 설정되었고, 1898년에 완공된 명동 성당(옛 종현 성당)보다 6년 앞선 1892년 한국교회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완공되었다. 서소문 순교성지를 품 안에 두고 있는 성당으로서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아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1999년에 서소문 공원 안에 1984년에 건립되었다가 1997년 철거당한 순교자 현양탑을 새로 제작하여 세웠다.
왜고개 성지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명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2명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성지다. 또한 왜고개 성지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 성지는 모두 10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명이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용산 성심 신학교(옛 용산 신학교 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성 요셉 신학당에서 그 기원이 있다. 이전에도 사제 양성을 위해 이미 정하상에게 신학교육을 시키고 1836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로 보내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배론 신학교는 폐교되었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2년 뒤인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다. 1892년에는 신학교 교사를 신축했고,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건립되어 축성되었다. 신학교 성당은 지난 1982년 교사와 함께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인 성심 성당은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곳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었었고,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주교좌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했다.
절두산 순교성지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는 수많은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처형되었고, 그래서 29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순교터에 성당과 순교 기념관을 건립을 시작해 이듬해 10월 축복식을 가졌다. 우뚝 솟은 절벽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주고 있다.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7위와 1위의 무명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지하 성해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된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대표하는 성지이나 인근 지역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주변 환경이 급속도로 훼손되자, 1997년 11월 교회의 노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성지 일원을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이란 명칭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했다. 그동안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성지는 있었으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곳은 절두산 순교성지가 처음이다.
종로 성당(포도청 순례지 성당)
좌 · 우 포도청은 조선 중종 때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임금 거동시의 호위를 맡거나 유언비어 유포, 위조 엽전 제조, 도박, 밀주 행위 등을 단속했다.
1784년 겨울,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첫 세례식이 거행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는 일은 좌 · 우 포도청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체포된 신자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때로는 매질 아래 목숨을 던지고, 목에 오라를 걸고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포도청에서의 형벌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법 이외의 형, 즉 남형(濫刑)이 자주 적용되었다.
서울대교구는 2013년 2월 28일 서울 좌 · 우 포도청을 관할구역에 둔 종로 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함으로써 100년에 가까운 박해 기간 중 가장 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탄생한 포도청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했다. 종로 성당은 구내에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마련하고 포도청 순교성인들을 기념하는 청동부조를 제작해 외벽에 설치한 후 같은 해 9월 2일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두 개의 도보순례길 코스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현재 서울시에서 설치한 좌포도청 기념 표석은 종로 3가역 9번 출구 앞에, 우포도청 기념 표석은 일민미술관 앞 화단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혜화동 성당
혜화동 본당 설립 전 동소문 지역의 신자들은 1909년 백동(현 혜화동)에 정착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주일미사에 참례하거나, 1918년경 설정된 동소문 밖 공소의 공소예절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1927년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하게 되자 서울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수도원 건물을 매입하여 1927년 4월 시잘레 신부를 초대주임으로 임명하고 서울 대목구의 세 번째 본당인 백동 본당(현 혜화동 본당)을 설립했다.
2006년 3월 서울에서 첫 번째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된 혜화동 성당은 1960년대 이후 건축되는 성당 건축의 모형으로서 근대적 건축미를 지닌 기념비적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성당 건립을 위해 가톨릭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한국 교회미술 발전의 계기가 되었으며, ‘교회미술의 보물창고’라 할 만큼 다양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