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소개

해외성지 국내성지
작성일 : 21-04-12 18:08
서울 대교구 성지 1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대학로 뒤편 낙산 산등성이 위에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나갈 젊은 신학도들의 못자리인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신학교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어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과 함께하고 있다. 1855년 충청도 제천 배론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당에서 시작된 가톨릭대학교의 역사는 박해를 이겨내고 1885년 강원도 여주군 범골(부엉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2년 뒤인 1887년에 서울 용산으로 신학교를 이전하였다.

1942년 일제에 의해 용산 신학교가 강제로 문을 닫기도 했지만, 해방과 함께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개칭하여 다시 문을 열었고, 성신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4년 가톨릭대학 의학부라는 이름으로 의학대학이 설립되었고, 1995년에는 성심여자대학교와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었다. 2015년에는 개교 16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갖고 새로운 도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가회동 성당

서울대교구 소속 본당(순례지).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57(가회동 30-3) 소재. 1949년 9월 명동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주보는 선교의 수호자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으나, 2014년 124위 시복식을 계기로 복자 주문모(周文謨) 야고보와 복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를 공동 주보로 정해 2018년 3월 30일 교구장의 승인을 받았다.

가회동 성당이 위치한 북촌 일대는 최초의 선교사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해 1795년 4월 5일 부활 대축일에 복자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에서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그리고 본당 관할구역 또한 주문모 신부가 복녀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사목활동을 펼쳤던 지역으로 한국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희문 성지

광희문은 장충단과 한강 사이의 수구문(水口門)으로 본래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하던 곳이었다. 그런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린 광희문은 천주교인에게는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계속되는 박해로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려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을 통해 내다 버려졌다. 서울대교구는 광희문의 역사적 · 교회사적 가치를 지키고자 2014년 8월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하고 한정관 바오로 신부를 초대 성지담당 신부로 임명하였다.

 

노고산 성지

노고산은 천주교 박해 때 여러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성지다. 현재 노고산 일대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땅 위에 학교 부지를 마련한 서강대학교는 2009년 6월 15일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매장되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를 기리기 위해 정문에서 가까운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당고개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거룩한 땅이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이 음력설 대목에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다. 이곳에서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홍병주 · 홍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만은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이는 어린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말 것 같아 배교하겠노라고 옥을 나온 모정의 결과였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순교의 칼날을 받았고,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명동 주교좌성당

명동 대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교회의 상징으로 1784년 이곳 명례방에서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다. 그 후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다음 블랑 백 주교가 종현의 땅을 부분적으로 매입하여 성당건립을 시도하던 중 신자수의 증가로 1892년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을 분가하고 코스트 신부가 성당 설계에 착수했다. 1896년 건립 도중 코스트 신부가 선종한 후 후임인 프와넬 신부가 성당 건축을 마무리하여 1898년 5월 29일 축성식을 갖고 한국교회의 주보인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께 성당을 봉헌했다.

1900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1901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 신학교로부터 받아 지하성당에 모셨고, 1909년에는 왜고개에 매장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지하성당에 안치했다. 1927년 백동(현 혜화동) 성당을 분가하고, 1939년 문화관을 신축하였으며, 1945년 광복을 맞아 성당명을 종현 성당에서 명동 성당으로 변경하였다. 기공 후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대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1843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자리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 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순교자의 시신은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혔고, 몇몇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해서 임시로 노고산에 매장했다. 그리고 4년 후 박 바오로가 자신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하였고, 그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어 후에 세 순교자의 유해를 명동 성당으로 모실 수 있었다. 1984년 세 순교자가 시성된 후 인근 부지를 매입해 성지를 조성하였고, 1992년 삼성산 본당이 신설되면서 성지를 관리 보존하고 있다.


 
 

(주)점프투어리즘 | 대표 : 김각현 | 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매화로 48번길 18-4 101호
사업자등록번호 : 129-86-64181 | 관광업신고번호 : 제159호 <사업장정보확인>
여행문의 : 031-706-9175 | 팩스 : 031-707-9176 | 메일 : yeollijea@naver.com




Copyright ⓒ (주)점프투어리즘 all rights reserved

※ 유류할증료의 변동에 따라 요금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