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소개

해외성지 국내성지
작성일 : 21-04-12 17:54
광주 대교구 성지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가톨릭목포(산정동 성당)

산정동 성당은 광주대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노령산맥을 따라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며 전남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의 역사를 쓰면서도 꾸준히 성장했다. 1896년까지 전남 지역은 본당 하나 없이 수류 본당에 속한 공소들만 있었지만, 1897년 뮈텔 주교가 전라도 지역을 순방하면서 나바위 본당과 목포 본당의 신설을 결정했다.

산정동 성당은 광주대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레지오 마리애가 처음 도입된 곳이며, 6.25 때 순교한 세 성직자의 순교기념비가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광주대교구는 산정동 성당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고 바로 옆 성 골롬반 병원으로도 사용되었던 옛 교구청 건물의 등록문화재 지정 등을 계기로 목포시와 손잡고 이 일대를 ‘가톨릭목포성지’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곡성 성당(옥터)

곡성은 1827년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터가 있는 곳이다. 당시 옹기굴의 직공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는데, 1827년 덕실 마을의 한 옹기점에서 가마를 여는 축하연 중 순교복자 한덕운 토마스의 아들인 한백겸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렸고, 주막집 주인이 현감에게 몇몇 신자들을 고발하면서 정해박해가 시작되었다.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해 대부분이 배교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막달레나, 이성지, 이성삼, 이경언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옥사하거나 순교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광주교구는 1957년 순교의 현장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박해 당시 옥터였던 객사 자리를 매입하여 1958년 8월에 본당 설립에 이어 그해 10월에 성당을 준공했다.

 

나주 무학당

나주 무학당(武學堂)은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성지로 조선군 병영의 정문이었다. 병인박해의 와중에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세 순교자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 곳으로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고 단지 나주 초등학교 교정을 무학당 터로 추정할 뿐이다. 광주대교구에서는 무학당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나주 성당을 중심으로 현양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나주 초등학교 정문 옆 화단에 이곳이 무학당 순교 터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나주 성당(나주 순교자 기념경당)

나주 성당은 1933년 공소가 설립된 후 1935년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성당을 신축했다. 이 성당은 골롬반 외방전교회가 한국에서 건립한 첫 번째 성당이다. 나주 성당 구내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 베드로와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한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네 순교자의 위대한 신앙을 기리는 경당이 자리하고 있다.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지인 무학당 인근에 위치한 관계로 나주 본당은 설립 70주년을 맞아 성역화를 본격화해 2001년 나주 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무학당 순교 터에서 주춧돌로 추정되는 12개의 돌 중 10개의 돌을 성당으로 옮겨와 그 위에 무학당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세웠다.

 

노안 성당

1894년 서울에 거주하던 정락 요한이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다가 함평군 나산면에 정착하여 한약방을 경영했는데,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주민들이 이 한약방을 왕래하면서 천주교가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양천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이진서가 정락을 만나본 후 친척인 이민숙, 이화서와 함께 교리를 공부하여 1900년 무안 우적동 사내에서 요양 중이던 이내수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계량 공소가 시작되었다.

1904년 무안군 우적동에 부임한 투르뇌 신부는 나주에 본당을 설립하고자 나주읍과 계량에서 각 7km 거리인 노안면 용산리 남산에 부지를 마련했으나, 매매 계약이 끝난 후 토지의 전 소유주가 계약을 파기해 버렸다. 결국 투르뇌 신부는 1908년 계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1910년 카닥스 신부는 넓은 부지를 매입해 40평 규모의 십자형 초가성당을 건립하고, 이어 벽돌을 찍어 2층 양옥 사제관 신축을 시작했다. 박재수 신부 재임 중인 1927년 벽돌조 사제관을 서구식 성당으로 확장 · 준공하고, 1933년 광주 북동 본당, 1935년 나주 본당을 공소에서 본당으로 분리하면서 본당 이름을 ‘계량 본당’에서 ‘노안 본당’으로 변경했다.

노안 성당은 나주 지역 및 광주대교구 복음화의 모태라는 역사적 의의와 함께 시대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는 건축 양식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9월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다산 초당

국토의 남단, 전라남도 강진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곳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무려 18년간이나 유배되었던 곳이다. 다산은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태어나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1770년대 후반 서학 서적을 접하면서 천주교와 관계를 맺었고, 그 진리에 매료되어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진산사건 등으로 박해가 거세지자 수차례 배교의 뜻을 밝혔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결국 유배의 길을 떠났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칭했다. 이는 아마도 자신의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으로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으로 사료된다.

정약용은 이 외딴 초당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고,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굳은 신앙을 보여 주었다. 유배 중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로 보입이며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의 생활을 하며 외부와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았다. 그리고 죽기 직전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영광 성당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영광 지역에 복음이 처음 전해진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유관검 형제의 모범과 애긍을 통해 그들이 소유한 전답의 소작인과 마름들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 복음이 전해졌다. 그리고 윤지충 바오로를 통해 전라도 각지에 복음이 전파되는데, 그와 인척 관계를 맺은 영광의 이우집 또한 유관검의 권유로 입교했다. 1791년 신해박해로 고산 저구리로 들어와 교우촌을 형성한 윤지헌 프란치스코를 통해서도 복음이 전해졌는데, 그를 찾아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이들 중에 영광의 윤종백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무장에 살던 최여겸 마티아의 열정적인 선교를 통해서도 전해졌는데, 그가 입교시킨 많은 사람 중에 영광에 살던 조카 최일안과 영광 고을의 양반인 이화백이 포함되어 있다.

영광 지역은 호남에서 천주교가 비교적 일찍 그리고 널리 퍼져 있었다. 영광 지역 신자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가 영광에서 순교했고, 이우집과 최일안은 전주에서 처형당했다. 그리고 이종집과 남조이는 황해도의 문화와 운율로 각각 귀양 갔고, 강완숙 골룸바의 딸 홍순희 루치아가 영광으로 귀양 왔다. 병인박해 중인 1867년 영광 뜸밭 출신으로 공주 국실에 살던 김치명이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1872년 한때 영광 신어실에 살았던 유문보 바오로가 나주에서 옥사로 순교했다. 여러 기록으로 보아 당시 영광 지역의 교세는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컸다고 보인다.

1937년 영광에 본당이 처음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한때 영광 본당은 폐쇄되어 산정동 본당과 함평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60년대 들어 신자가 늘자 1965년, 전쟁 당시 전소된 성당 자리에 새 성당을 재건하고 12월에 공소에서 본당으로 재승격되었다.

 

함평 성당

1930년 이계윤과 최말녀 부부가 목포에서 함평으로 이주해 오자 계량(현 노안) 본당의 박재수 신부는 이들을 위해 1931년 판공 때 함평의 기산 회관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후 내교리에 사는 조 마리오 집에서 주일 미사를 가끔 봉헌했다. 이어 1936년경부터는 나주 본당의 헨리 신부와 김재석 신부가 번갈아 와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1940년경부터는 신자들이 나주 본당이나 인근 공소의 미사에 참여했다. 이후 함평 공소 신자들은 본당 설립을 위한 노력을 경주해 마침내 1945년 12월 8일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 김창현 신부는 1949년 여름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해 1950년 5월 상량식을 거행한 뒤 8월 15일에 봉헌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10월에 후퇴하던 공산군이 불을 지르면서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1951년 12월에 함평을 방문한 교황 사절단이 개축을 위한 지원을 약속하여 1952년 4월에 개축 공사가 시작되었고, 10월 13일에 헨리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1983년 4월 서상채 신부는 성전신축추진위원회를 결성한 뒤 10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8월 21일 윤공희 대주교의 집전으로 새성전 봉헌식을 거행했다. 1997년에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시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IMF의 여파로 일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2000년 4월 비로소 공사가 완료했다. 1952년에 건립된 옛 성당은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가는 성당 건축 흐름의 변곡점에 건립된 건축물로 현대 성당 건축의 시초로 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아 2004년 12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주)점프투어리즘 | 대표 : 김각현 | 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매화로 48번길 18-4 101호
사업자등록번호 : 129-86-64181 | 관광업신고번호 : 제159호 <사업장정보확인>
여행문의 : 031-706-9175 | 팩스 : 031-707-9176 | 메일 : yeollijea@naver.com




Copyright ⓒ (주)점프투어리즘 all rights reserved

※ 유류할증료의 변동에 따라 요금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