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대교구 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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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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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목포(산정동 성당) 산정동 성당은 광주대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노령산맥을 따라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며 전남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의 역사를 쓰면서도 꾸준히 성장했다. 1896년까지 전남 지역은 본당 하나 없이 수류 본당에 속한 공소들만 있었지만, 1897년 뮈텔 주교가 전라도 지역을 순방하면서 나바위 본당과 목포 본당의 신설을 결정했다. 곡성 성당(옥터) 곡성은 1827년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터가 있는 곳이다. 당시 옹기굴의 직공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는데, 1827년 덕실 마을의 한 옹기점에서 가마를 여는 축하연 중 순교복자 한덕운 토마스의 아들인 한백겸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렸고, 주막집 주인이 현감에게 몇몇 신자들을 고발하면서 정해박해가 시작되었다.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해 대부분이 배교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막달레나, 이성지, 이성삼, 이경언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옥사하거나 순교했다. 나주 무학당 나주 무학당(武學堂)은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성지로 조선군 병영의 정문이었다. 병인박해의 와중에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세 순교자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한 곳으로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고 단지 나주 초등학교 교정을 무학당 터로 추정할 뿐이다. 광주대교구에서는 무학당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나주 성당을 중심으로 현양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나주 초등학교 정문 옆 화단에 이곳이 무학당 순교 터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나주 성당(나주 순교자 기념경당) 나주 성당은 1933년 공소가 설립된 후 1935년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성당을 신축했다. 이 성당은 골롬반 외방전교회가 한국에서 건립한 첫 번째 성당이다. 나주 성당 구내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 베드로와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한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네 순교자의 위대한 신앙을 기리는 경당이 자리하고 있다. 노안 성당 1894년 서울에 거주하던 정락 요한이 박해를 피해 숨어 다니다가 함평군 나산면에 정착하여 한약방을 경영했는데,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주민들이 이 한약방을 왕래하면서 천주교가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양천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이진서가 정락을 만나본 후 친척인 이민숙, 이화서와 함께 교리를 공부하여 1900년 무안 우적동 사내에서 요양 중이던 이내수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계량 공소가 시작되었다. 다산 초당 국토의 남단, 전라남도 강진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곳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무려 18년간이나 유배되었던 곳이다. 다산은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태어나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1770년대 후반 서학 서적을 접하면서 천주교와 관계를 맺었고, 그 진리에 매료되어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영광 성당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영광 지역에 복음이 처음 전해진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유관검 형제의 모범과 애긍을 통해 그들이 소유한 전답의 소작인과 마름들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 복음이 전해졌다. 그리고 윤지충 바오로를 통해 전라도 각지에 복음이 전파되는데, 그와 인척 관계를 맺은 영광의 이우집 또한 유관검의 권유로 입교했다. 1791년 신해박해로 고산 저구리로 들어와 교우촌을 형성한 윤지헌 프란치스코를 통해서도 복음이 전해졌는데, 그를 찾아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이들 중에 영광의 윤종백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무장에 살던 최여겸 마티아의 열정적인 선교를 통해서도 전해졌는데, 그가 입교시킨 많은 사람 중에 영광에 살던 조카 최일안과 영광 고을의 양반인 이화백이 포함되어 있다. 함평 성당 1930년 이계윤과 최말녀 부부가 목포에서 함평으로 이주해 오자 계량(현 노안) 본당의 박재수 신부는 이들을 위해 1931년 판공 때 함평의 기산 회관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후 내교리에 사는 조 마리오 집에서 주일 미사를 가끔 봉헌했다. 이어 1936년경부터는 나주 본당의 헨리 신부와 김재석 신부가 번갈아 와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1940년경부터는 신자들이 나주 본당이나 인근 공소의 미사에 참여했다. 이후 함평 공소 신자들은 본당 설립을 위한 노력을 경주해 마침내 1945년 12월 8일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