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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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1894년 신나무골에서 경상도 북부 지방 선교를 담당하던 파이야스 신부는 가실(佳室)로 이주하여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가실 성당을 설립했다. 1912년 부임한 투르뇌 신부는 1944년 지병으로 사망하기까지 가실 본당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일제 강점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했다. 또한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1925년 9월 드망즈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사절 지아르디니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투르뇌 신부는 1922-1924년 사이에 현재의 신 로마네스크식 벽돌조 성당을 건립했는데, 설계는 명동 성당과 대구 계산 성당을 지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와넬 신부가 담당했다. 프와넬 신부는 중국 기술자들에게 벽돌을 한 장씩 굽도록 하여 잘 구워진 것은 성당을 짓는데, 중간치는 사제관을 짓는데, 품질이 나쁜 것은 버렸다고 한다. 당시의 유물과 유산은 현재 유물관(구 사제관)에 보존되어 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동양화가 손석희가 그린 십자가의 길 14처와 독일의 유명한 색유리 작가 에기노 바이너트가 제작한 유리화를 2002년에 설치했다. 10개의 창문에 설치된 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의 삶’이다.
대구대교구에서 현 계산 주교좌성당에 이은 두 번째이자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인 가실 성당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근대 건축사와 교회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옛 사제관과 함께 2003년 4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되었다.
계산 주교좌성당
계산 성당은 1886년 블랑 주교에 의해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11년 대구대목구의 신설과 함께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는 박해의 여파로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 박해 이후 죽밭골로 옮겼고, 1891년 대구 교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으로 대구에서 추방되었다. 그 해 다시 대구로 돌아온 로베르 신부는 대어벌에 임시 성당을 구했고, 이어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했다.
1899년 전통 한식의 목조 성당을 완공해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축성식을 거행했으나 190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재차 성당 건립을 시작해 1902년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식 벽돌조 성당을 준공했다. 두 번의 성당 내부 공사에 이어 1918년 기존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당의 동남북 3면을 증축해 1919년 5월 재차 축성식을 갔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산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대구 관덕정 순교성지 (관덕정 순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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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관덕정(觀德亭)은 조선 시대 무과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영조 25년에 세워졌다. 관덕정 앞마당에 자리한 연병장에서는 무과를 위한 활쏘기와 말타기, 세시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도 행해졌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연관을 맺은 것은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처형장에서 천주교인들이 순교하면서부터다. 당시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천주교인들은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선조 34년에 경상도 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경상도 전역의 교우들이 대구로 이송되어 감영에서 옥사하거나 처형장에서 순교했다. 이렇게 관덕정과 감영 등 대구 지역에서 순교한 20위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관덕정이 순교성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순교자 이윤일 요한이 시성되면서부터이다. 대구대교구는 사형터로 고증된 부지를 확보하여 1985년 순교기념관 기공식을 시작으로 1991년 1월 20일 지하경당 축복식과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갖고 그해 5월 31일 개관하였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당시 관덕정 모습을 재현한 순교 기념관에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와 함께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 그리고 영남 지역 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복자 성당
대구 도심에 위치한 복자 성당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3위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김해, 공주, 서울 태생인 세 순교자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의 교우촌으로 피난해 온 이들이다. 울산 장대에서 한날한시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이들의 시신은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에 의해 처형 직후 형장 근처의 강둑 아래 가매장되었다가 1907년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 합장되었다. 그 후 1932년 월배동 감천리의 교회 묘지로 옮겨졌다가 1973년 복자 성당 구내로 모셔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자 성당은 대구대교구가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기념해 교구민의 성금으로 1970년 설립한 성당으로 1973년 3위 순교자의 유해를 이장하면서부터 도심의 순례지로서 순교신심의 중심지가 되었다. 2002년 순교자 묘역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묘소를 새로 단장하고 묘역 둘레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으며, 묘소 앞에는 넓은 잔디마당을 마련했다. 또한 성당 내부 제대와 감실에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여러 성인들의 유해를 안치했다.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11년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 · 신학교 · 주교좌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루르드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지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고, 그 결과 1912년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아 공사를 시작했다.
1914년 10월 3일 개교한 신학교는 기부자의 요청대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명명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7명의 대구대목구 소속 신학생들을 포함하여 57명을 받아들여 1918년 첫 출신 사제를 배출했다. 사제양성 교육기관으로 꾸준히 성장하던 신학교는 일제에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1944년 12월 23일의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었다. 신학교의 건물과 부지는 1945년 3월 31일 일본군 제218 부대에 징발되었다. 1982년 사제 양성을 위해 47년 만에 선목신학대학으로 재개교한 후 1985년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했고, 1994년에는 효성여자대학교와 통합하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대구관구 대신학원)이 되었다. 현존하는 신학교 건물은 1990년 12월 15일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성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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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청 내에 위치한 성모당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순례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열린 성지, 치유의 성지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 · 설치되면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교구에 꼭 필요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을 이뤄주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여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허원을 드렸다.
1913년과 1914년에 주교관과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건립했고, 주교좌성당 증축이 늦어지던 중 당시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 신부가 중병을 앓아 선종 직전에 이르자 드망즈 주교는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 마침내 축성식을 가졌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해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이다.
성모당은 신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거룩한 땅일 뿐 아니라 각종 가톨릭 신심행사와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사적지로 외교인들도 큰 호기심을 갖고 있는 대구의 명소아다. 1990년 12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o
신나무골 성지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지인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았다. 신나무골은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면서도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가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고, 샤스탕 · 다블뤼 · 최양업 · 리델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박해가 잦아들면서 다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영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순회 전교를 시작했다. 1885년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짓고 정착한 로베르 신부는 이듬해 대구 본당을 설립하고 곧이어 대구 읍성 전교에 나섰고, 1898년 계산동에 십자형 한옥 성당을 건립했다. 그러나 이 성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그 자리에 현 계산동 주교좌성당의 원형이 되는 라틴 십자형의 고딕 성당을 지어 1903년 축성식을 올렸다.
대구 교회 첫 본당 터인 신나무골 성지는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를 성지 입구로 이장했다. 이선이 엘리사벳과 그의 남편 배정모 그리고 세 아이는 1860년 경신박해 때 칠곡을 떠나 잠시 신나무골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한티로 다시 숨어들었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남편 배정모는 배교했지만 이선이 엘리사벳과 장남 스테파노(배도령)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그 자리에서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 배교하고 풀려났던 남편은 뼈저린 아픔 속에 부인과 아들의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다가, 다시 선산이 있는 칠곡의 안양동으로 부인의 시신만 이장했다.
1977년 제1차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대구 천주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지를 관할하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를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에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등을 2차로 복원했다.
진목정 성지
경주 진목정에는 허인백 야고보,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범굴과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후 시신이 안장되었던 의묘가 있다. 이양등은 울산 죽령 교우촌의 회장으로 병인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허인백과 김종륜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2년 뒤인 1868년 포졸들이 교우촌에 들이닥쳐 경주 진영으로 끌려간 세 순교자는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사형선고를 받고 울산 장대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들이 순교한 후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대 인근의 강둑 아래에 안장했고, 박해가 끝난 후인 1907년 박조예의 확인을 거쳐 순교자들의 유해가 발굴되어 유족들에 의해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32년 5월 말 순교자들의 유해는 월배동 감천리에 있는 교회 묘지로 옮겨졌고, 1962년 10월 교회 묘지 산상에 있는 성모상 앞의 석함에 옮겨 안치되었다가, 1973년 10월 대구시 동구 신천 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옮겨 안장되었다. 세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세 순교 복자가 묻혔던 도매산 아래에는 오래된 진목 공소가 있고, 공소를 지나 약 700m 정도 산길을 오르면 1932년까지 세 순교자가 안장되었던 묘지가 있다. 진목 공소에서 약 3.6km 떨어진 단석산(소태리 단수골)에는 세 순교자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다는 범굴이 있다.
한티 순교성지
대구에서 북쪽으로 약 24km, 심심산골에 있는 한티는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몸을 숨긴 곳이자 그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순교성지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인근 신나무골과 비슷한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산 것으로 추정된다. 1860년 경신박해로 큰 아픔을 겪었지만,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 안에서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넘긴 한티 마을은 1866년 시작하여 3년 가까이 이어진 병인박해의 여파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되었다. 1868년 한티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배교하지 않는 교우들을 현장에서 처형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박해 소식을 들은 인근 교우들이 왔을 때는 이미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이 산야 곳곳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순교한 그 자리에 시신을 안장했고, 지금까지 확인된 순교자의 묘는 모두 37기로 그중에서 조 가롤로 가족 등 4기만 신원이 알려져 있다.
박해의 먹구름이 지나간 뒤 조영학 토마스(조 가롤로의 아들)와 몇몇 교우들은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이어가기 위해 공소 재건에 앞장섰다. 재건된 공소는 1900년 초 신자 수 80여 명 이상의 전성기를 거쳐 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기까지 공소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