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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12 17:22
마산 교구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대산(복자 구한선 타대오)

순교복자 구한선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어른이 된 후 소촌[文山] 교우촌에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고성 통영 교우촌을 지나 거제도까지 전교 여정에 동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집에서 지내던 중 진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는 관장 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옥에서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간 뒤 석방되었지만 집에 돌아온 지 7일 만에 장독으로 인해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하기리의 ‘신씨’들 묘소 한구석에 묻혔다.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명례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인 명례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이다. 명례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가 출생한 곳이며, 오래된 교우촌으로 1897년 영남 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또한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 방인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사목하다 돌아가신 곳이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태어나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며 살았다. 낙동강을 건너는 명례 나루터에는 일찍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정착했고,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은 듯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사하러 갔다 오던 중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밀양으로 압송되었고, 대구로 끌려가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형을 받은 뒤 3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이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왔지만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고, 1975년 12월 진영 본당 신자들에 의해 본당 공원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문산 성당

지금의 진주 · 함안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이다. 그 후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리델 신부와 함께 1865년경 거제도를 방문한 함안 출신의 순교 복자 구한선 타대오가 병인박해 때 매를 맞아 순교한, 진주 문산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도 바로 박해 전 구 타대오에 의해서였다. 박해 후 교우촌은 재건되었고, 1883년 로베르 신부의 방문으로 소촌(召村, 현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마산(현 완월동) 본당의 무세 신부는 소촌 공소의 신자수가 늘자 1905년 9월 무세 신부를 보좌를 받아 소촌 본당을 설립했다. 1907년 줄리앙 신부가 소문리의 현 성당 부지와 찰방 관서였던 기와집을 매입해 성당으로 사용했으나 너무 노후화되어 1923년 11월 김양홍 신부가 기와집 성당을 신축했다. 계속되는 교세의 증가로 김영제 신부는 1935년 새 성당 신축에 착수하여 1937년 5월 성당과 사제관 · 수녀원을 건립하고 기존의 한옥 성당은 유치원 강당으로 이용했다. 새 성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과 벽체를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한 서양식 건물로 정면에 뾰족한 종탑을 세운 고딕 양식을 택했다.

문산 본당의 한옥과 고딕 양식의 두 성당은 동서양 건축양식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두 가지 양식의 성당이 공존함으로써 우리나라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박대식 빅토리노 묘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2년 현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입교한 후 가족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8년 무진박해 때 대구와 김해에서 온 포졸들에게 잡혀 조카 박수연과 함께 김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만나 3일간 문초를 받으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고, 대구로 압송되어 감영에서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결국 박대식은 1868년 10월 12일 조카와 송 마태오, 박 요셉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가족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와 선영에 모시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인근의 유씨 문중 산에 평장으로 매장했다. 그 후 1956년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했다. 1966년 진영 본당 주임신부의 주선으로 순교자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고, 2001년 그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이 밝혀졌다. 진례 성당은 매년 후손들과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박대식 빅토리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사봉(정찬문 안토니오 묘)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묘가 있다. 1822년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난 정찬문은 대산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칠원 윤씨와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 가을 진주 포졸에게 체포된 정찬문은 감옥에서 25일 동안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배교하지 않았다.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은 그는 모진 매를 견뎌내고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던 그의 시신을 사촌들이 몸체만 수습해 고향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두묘로 불리기 시작했고, 그 후 순교자의 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잊혀갔다.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신부는 굼실 공소 회장에게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48년 3월 무촌리에 살던 광산 김씨 할머니의 제보를 받아 허유 고개 길섶에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 31일 순교자의 유해를 확인하고 그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 후 1975년 그 인근에 새로 조성된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했고, 1978년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순교비를 건립했다. 정찬문 안토니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신석복 마르코 묘

순교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태어나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며 살았다. 낙동강을 건너는 명례 나루터에는 일찍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정착했고, 그들로부터 신앙을 전해 받은 듯하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사하러 갔다 오던 중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밀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를 안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한 푼도 주지 말라.”며 대구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형을 받으면서도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결국 1866년 3월 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왔지만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고, 1975년 12월 진영 본당 신자들에 의해 본당 공원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옛 구한선 타대오 묘

순교복자 구한선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어른이 된 후 소촌[文山] 교우촌에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고성 통영 교우촌을 지나 거제도까지 전교 여정에 동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집에서 지내던 중 진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는 관장 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옥에서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간 뒤 석방되었지만 집에 돌아온 지 7일 만에 장독으로 인해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하기리의 ‘신씨’들 묘소 한구석에 묻혔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1959년 당시 함안 본당 주임신부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고향 인근 하기리에서 순교자의 묘를 찾아 1976년 평림리 가등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대산 본당은 2002년 5월부터 마산교구의 대표적인 순교자 중 한 명인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그해 9월 18일 묘지 축복식을 갖고 부대시설과 십자가의 길, 야외제대, 순교 현양비, 대형 십자가 등을 설치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옛 윤봉문 요셉 묘

거제도 진목정 족박골(현 옥포)에는 ‘거제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묘가 있었다. 신유박해 당시 신자들의 유배지였던 거제도에 병인박해 직전 리델 신부가 전교를 위해 다녀가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8년경 박해를 피해 거제로 들어와 진목정에 정착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아들로 진 아녜스와 혼인하여 아들딸을 낳고 살면서 형 경문 베드로와 함께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썼다.

1887년 겨울, 대구 본당 초대주임인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방문했을 때 신부를 안내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을 돕던 윤봉문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봄 박해가 일어났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공적인 박해가 끝났지만 지방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탄압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박해는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것이었다.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고 천주십계와 성교사규를 외우던 그는 결국 진주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장재리 공소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가 1898년 옥포 교우이며 부산 본당 우도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와 유족들에 의해 옥포의 선산으로 이장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1978년 9월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고, 거제와 통영 지역 본당들은 순교자에 대한 현양 사업과 함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윤봉문 요셉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옥봉동 성당

경북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낙동강을 따라 남하한 신자들과 전라도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지리산과 덕유산을 넘어 남강을 따라 내려와 문산에 정착한 신자들에 의해 진주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 두 경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진주에 사는 정찬문 안토니오와 구한선 타대오가 순교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병인박해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진주의 교우촌들은 1880년대에 이미 안정을 찾았고, 문산의 소촌과 진주의 비라실 교우촌은 1883년 로베르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다.

경상도 서부 지역 신자가 증가하자 뮈텔 주교는 1899년 부산 본당의 타케 신부에게 진주에 본당을 설립하도록 했다. 타케 신부는 그 해 6월 진주 본당을 설립했지만 신자도 별로 없고 아전들이 노골적으로 방해로 전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본당 이전을 결심했다. 1900년 개항장으로 장래가 유망한 마산포로 가서 마산 본당을 설립하면서 진주 본당은 공소로 전락했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면서 드망즈 주교는 진주읍내의 옥봉동 산 밑에 공소를 마련했고, 이 공소의 초대회장 이낙종과 그의 아들 이상석의 전교와 신자들의 정성으로 1923년 본당 설정의 기초가 될 목조건물을 신축했다. 마침내 1926년 5월 이 공소는 진주(현 옥봉동)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32년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지를 추가 매입하여 붉은 벽돌로 된 근대식 새 성당을 건립해 이듬해 9월 봉헌식을 거행했다. 1957년 신설 부산대목구에 속하게 된 진주 본당은 최재선 주교의 권유로 프란치스코회가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고, 1966년 마산교구의 신설로 다시 교구 관할이 되었다. 이때 본당 이름도 옥봉동으로 바뀌었고, 성당 건물 또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세포리(순교자 윤봉문 요셉)

거제도 진목정 족박골(현 옥포)에는 ‘거제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복자 윤봉문 요셉의 묘가 있었다. 신유박해 당시 신자들의 유배지였던 거제도에 병인박해 직전 리델 신부가 전교를 위해 다녀가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8년경 박해를 피해 거제로 들어와 진목정에 정착한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활발한 전교활동을 펼쳤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아들로 진 아녜스와 혼인하여 아들딸을 낳고 살면서 형 경문 베드로와 함께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썼다.

1887년 겨울, 대구 본당 초대주임인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방문했을 때 신부를 안내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을 돕던 윤봉문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듬해 봄 박해가 일어났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공적인 박해가 끝났지만 지방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탄압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박해는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것이었다.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고 천주십계와 성교사규를 외우던 그는 결국 진주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장재리 공소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가 1898년 옥포 교우이며 부산 본당 우도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와 유족들에 의해 옥포의 선산으로 이장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1978년 9월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고, 거제와 통영 지역 본당들은 순교자에 대한 현양 사업과 함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순교자 윤봉문 요셉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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