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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12 16:41
부산 교구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김범우 순교자 성지

 

한국 천주교의 첫 증거자 또는 첫 순교자로 불리는 김범우 토마스의 묘가 발견된 것은 1989년이다. 이전까지 그의 유배지는 충청도 단양(丹陽)으로 알려졌지만 1980년대 초 김범우의 묘를 백방으로 찾던 후손 김동환이 나타나면서 단양이 아니라 밀양 단장(丹場)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 후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1989년 극적으로 김범우의 외손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산102번지 만어산 중턱에서 묘를 찾았다.

이 지역에 대한 천주교의 전래는 바로 김범우의 귀양살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김범우는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위해 명례방(현 명동 성당 인근)에 있던 자신의 집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형조에 끌려가 많은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다. 끝내 배교하지 않은 그는 멀리 밀양으로 귀양을 떠났고, 유배생활 중에도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전파하던 중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1786년 가을(혹은 1987년 초) 세상을 떠났다.

 

간월 김 아가타 묘

간월골에 살던 동정녀 김 아가타는 언양의 첫 신자 김교희 프란치스코의 손녀로 1860년 경신박해 때 아버지 김상은 야고보와 오빠 김영제 베드로가 잡혀가자 뒤를 따르고자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포졸들이 다른 데로 팔아넘기려 하자 도망쳐 나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피신해 있는 죽림굴에서 은신하며 지냈다.

여기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바깥소식을 전하고 식사 준비와 빨래 등으로 최 토마스 신부를 정성껏 공경하였다고 한다. 잡혀갔던 후유증으로 여러 날을 앓다가 모든 성사를 신심 깊게 받은 김 아가타는 최양업 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24세의 나이로 선종하였으며, 둘러있던 교우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시신에다 솔가지를 덮고 묘비인 패장을 세워 주었으며, 며칠 후 교우들이 간월골로 옮겨와 공소 뒷산에 매장하였다.

김 아가타의 아름다운 생애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다가 최양업 신부가 1860년 9월 죽림굴에서 리브와 신부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냈던 마지막 편지에 그녀가 소개되어 있음이 후에 확인되었다. 1991년 4월 부산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김 아가타의 묘소를 정리하고 비석을 세웠고, 2008년 3월 김 아가타의 묘를 살티에 있는 오빠 김영제 베드로의 묘 옆으로 이장하고 그해 9월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간월 공소 뒷산의 묘소 또한 보존하고 있다.

 

 

살티 공소

살티 공소(1868년~)는 인근의 간월 공소와 대재 공소가 박해로 파괴되면서 설립되어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다. 박해 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맹수가 많아 사람이 찾아 들기 힘든 은밀한 지역이었기에 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피난처였다. 혹독한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안살티에 정착해 살던 신자들은 논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를 찾아 현재의 공소가 있는 살티로 내려와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공소 인근에는 극심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고생하다가 1876년 살티에서 치명한 김영제 베드로의 묘가 있다. 후손들에 의해 순교자들의 신앙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살티는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온 교우촌이자 최재선 주교를 포함해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聖召)의 고장이다.

 

살티 김영제와 김 아가타 묘

부산 지방 최초의 신자가 된 조부 김교희 프란치스코와 부친 김상은 야고보에게 신앙을 물려받은 김영제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부친과 함께 여러 교우촌을 전전하다가 간월로 돌아와 공소를 설립하고 1858년에는 공소 건물을 짓기도 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한양까지 압송되었다가 풀려난 그는 1868년 무진박해 때 다시 체포되었고, 이때 많은 신자들이 붙잡혀 간월 공소는 물론 대재 공소 또한 소멸되었다. 김영제가 잡히면서 집은 불태워지고 가산은 몰수됐으며 가족들은 또다시 흩어지고 말았다.

대구에서 그는 전교 신부들의 행방을 묻는 관리들로부터 극심한 고문과 문초를 당했고, 이때 받은 고문으로 종지뼈가 으스러져 불구의 몸이 되었다. 한양까지 이송되었다가 9개월 만에 특별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피신한 가족들을 수소문해 안살티에 정착한 후 여기서 다시 살티 공소를 설립해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박해가 뜸해지자 농사가 가능한 평지를 찾아 현재의 살티로 이주했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이 전신에 퍼지는 고통 속에서 살다가 결국 1876년 1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살티 공소 인근에 위치한 김영제의 묘소는 1981년 11월 언양 성당 신자들이 정성을 모아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수영장대

우리나라 최대 항구 도시인 부산에는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안동에 경상좌수영이 있어서 붙잡혀 온 천주교인들을 이곳에서 처형하곤 했다. 오늘날 동네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수영 장대골에서는 병인박해 당시 동래의 전교회장이던 이정식 요한을 비롯한 8명의 천주교인들이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이정식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임을 거치던 중 59세의 나이에 천주교에 입교한 후 무관직을 사임하고 가족과 이웃들을 권면하여 입교시키는 등 누구보다 수계와 전교에 열심이었다. 이런 이유로 동래의 전교회장이 되어 자신의 본분을 다하던 중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그는 가족들과 함께 기장으로 몸을 피했다가 1868년 봄 울산으로 다시 피신했다. 그러나 박해가 점점 심해지고 동래 포졸들 역시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고 그들의 종적을 찾았다. 결국 이정식의 가족은 울산에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동래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이정식은 앞서 동래에서 체포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를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했다. 동래 부사는 그들을 47일간 가두어 두고 여러 번 심문하며 형벌을 가했으나 전혀 흔들림이 없자 경상 좌수사에게 넘겨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1868년 9월 이정식과 그의 아들 부부 등 8명은 수영장대에서 순교했다.

이들이 순교한 후 이정식 회장의 가족 4명의 시신은 친척들에 의해 거두어져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에 묻혔다가 1977년 9월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내로 옮겨 안장되었다. 이때 나머지 4명의 순교자들은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기념비만 건립했다. 이정식과 양재현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언양 성당

경상도 남부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언양 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늦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는 경남 최초의 공소인 내간월 불당골 공소가 있었는데, 불당골은 김재권(프란치스코)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던 곳이다. 불당골은 선교사들을 맞이할 무렵 공소로 변모했으며,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주교가 방문하던 1850년대 말에는 언양 일대가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변모되어 간월, 죽림(대재, 죽령), 탑곡, 예씨네골, 진목정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지만 박해가 끝난 뒤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 신부가 1883년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도 설립하였다. 언양 지역의 신자들은 이미 1888년부터 본당 설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1926년 12월 5일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 신부가 부임했다. 보드뱅 신부는 즉시 성당 신축을 계획했고, 1929년 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여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다.

보드뱅 신부가 직접 설계를 맡고, 명동 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과 6년에 걸친 신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언양 성당(사제관 포함)은 고딕식 형태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이다. 또한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했다.

 

오륜대

오륜대 순교자 성지에 들어서면 먼저 순교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의 흉상, 그리고 성모자상이 순례자를 반기며 서 있고,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이란 글귀 너머로 박물관과 순교자 성당 그리고 그 뒤로 우거진 숲이 펼쳐진다. 박물관 옆에 있는 순교자 성당 앞에는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 신부와 다블뤼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서 제주도로 표류한 끝에 강경 부근 황산포에 상륙한 라파엘호 축소 모형이 놓여있고, 그 옆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돌 형구가 있어 당시 박해 상황을 한마디로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성당 뒤로는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이 이어지는데, 그 초입에 병인박해의 서슬 아래 1868년 수영장대에서 순교한 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를 포함한 8위 부산 순교자 묘역이 말끔히 정돈되어 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는 194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에 의해 '복음 선포와 순교자 현양'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수녀회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고 순교 신앙을 후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 순교자 관련 유물과 교회사 관련 자료 등을 수집하거나 기증받아 이를 전시할 기념관 설립을 계획했다. 서울대교구에서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967년에 절두산 순교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박물관)과 성당을 건립하자 수녀회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부산 지역에 한국순교자기념관을 건립키로 결정하고 현 오륜대 부지에 분원을 설치했다.

 

울산병영

1860년 경신박해 때와 병인박해 중인 1868년, 두 차례의 큰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울산병영 장대에서 순교했다. 경신박해 때 백지사형으로 순교한 오치문, 병인박해 때 경주 감옥에 갇혔던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회장 등이 이곳에서 군문효수를 당했다. 이 세 순교자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중의 대재 공소[죽령]로 숨어들었지만 결국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를 거쳐 울산병영 장대로 압송되어 1868년 9월 14일(음력 7월 28일) 순교의 영광을 입었다.

세 순교자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가 수습해 사형장 근처 강둑 아래 가매장했다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교인들의 장례가 가능해지자 1907년 유족들에 의해 연고가 있는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으로 옮겨 합장했다. 그러다가 1932년 5월 말 유족들에 의해 대구 월배 천주교회 묘지로 다시 이장하였고, 1962년 10월 월배 교회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안장했다가 1973년 10월 19일 대구시 동구 신천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씨 형제 순교자 묘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배씨 가문의 선산에는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증거하고 죽음을 택한 조석빈과 조석증 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다. 창녕 조씨 김해파의 30대 손으로 태어난 석빈과 석증은 천주교에 입교한 후 열심히 선교 활동을 했다. 조씨 형제는 모습과 나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으며 한문 성경을 한서 속에 감춘 나무상자를 매고 주로 양반들을 찾아다니면서 천주학 연구와 전교에 앞장섰다. 생곡의 배씨 사랑방에도 자주 들러 유학과 서학의 비교 연구에도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 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김해읍 왜장대에서 참수되었다.

 

죽림굴(대재 공소)

죽림굴, 곧 대재 공소(1840-1868년)는 울주군의 간월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천연 석굴로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눈에 잘 띄지 않아 박해 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 안성맞춤인 한국판 카타콤바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충청도 일원과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과 간월 공소의 교우들이 보다 안전한 곳을 찾다가 발견하여 공소를 이룬 곳으로,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1840년부터 1860년 사이에는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사목을 담당했다. 특히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가 약 3개월간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하고, 스승에게 보낸 마지막 서한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때 김영제 베드로의 누이동생인 김 아가타가 포졸들을 피해 도망쳐와 3개월간 머물며 최양업 신부를 돕다가 선종한 곳이다. 울산 병영 장대에서 순교한 대재 공소 회장 이양등 베드로와 허인백 야고보 그리고 김종륜 루카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868년에 교우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100여 명이 넘었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대재 공소는 폐쇄되고 말았다.

1986년 10월, 당시 언양 성당의 김영곤 신부와 평신도 11명이 죽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그 해 11월 평신도 4명이 재시도하여 대나무와 풀로 뒤덮인 굴을 발견했다. 당시 굴 안에서 구유조각과 나무지팡이 등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언양 성당 신앙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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