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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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12 16:01
인천 교구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갑곶 순교성지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및 문화 유적이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를 초래했던 병인양요의 현장으로 강화대교 서쪽 끝에 있는 갑곶돈대에서부터 박해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후퇴했으나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갑곶 성지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이슬로 사라졌고, 또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당한 강화에 살던 신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진두에서 순교하였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이후 1999년 11월 성지를 새로 단장하고 2001년 7월 제대 및 십자가의 길과 성모상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해 9월 20일에는 신미양요 때 순교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순교자비를 세우고,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이며 인천교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 증거자의 유해 안장식을 가졌다.

 

강화고려궁지(관청리 형방)

강화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1232년(고려 고종 19년)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던 곳이다. 1964년 사적 제133호로 지정된 ‘고려궁지’에는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호인 강화유수부 동헌과 제26호인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강화동종(1999년에 만든 복제품, 원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이동 전시) 등이 남아 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곳 동헌과 형방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자행되었던 순교사적지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 시대에 해상경비의 임무를 맡았던 군영이자 많은 천주교 신자의 처형지이기도 한 진무영 순교성지가 고려궁지 앞에 있었다.

 

답동 주교좌성당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으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인천 · 부평 ·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다. 답동 본당의 설립은 조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대지를 물색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조선교구는 페낭 신학교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빌렘 신부에게 새 본당을 맡겼고, 빌렘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제물포에 진출하여 본당을 설립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889년 7월 1일이었다.

 

성체 순례 성지(옛 김포 성당)

김포 지역의 전교 역사는 1900년경 시작되어 1910년 김포읍 걸포리에 행주 본당 걸포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1946년 11월 행주 본당에서 분리되어 걸포리 본당으로 승격된 후 발전 가능성이 큰 김포읍에 성당부지를 마련해 성당 건립에 들어갔으나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6년 12월 신인식 신부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석조 성당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본당명은 1949년에 걸포리에서 김포로 변경했다.

1961년 인천대목구의 설립으로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하여 활발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교구 사제들의 노력으로 신자 수가 증가하자 본당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1999년 석조 성당 아래 새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로써 신구 성당이 공존하며 과거와 현재를 통시에 느낄 수 있게 되었다. 2006년 60주년을 기념해 교육관을 신축하고 옛 석조 성당을 대대적으로 수선하여 피정 공간으로 꾸미고 야외동산에는 십자가의 길도 새로 조성했다. 2013년에는 김포 지역 천주교의 모태로서 한국전쟁 이후 건축된 석조 성당을 대표하는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되었다.

 

이승훈 베드로 묘(반주골)

반주골에는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자 창립 선조의 한 명인 이승훈 베드로의 묘와 장남 이택규와 3남 이신규 마티아 순교자의 묘가 있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의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말 동지사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세례를 받은 후 교리서와 성물 등을 갖고 귀국해 강학회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명례방 집회를 열며 가성직제도를 주도하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과 조상 제사 문제, 부모의 적극적인 반대 등으로 잠시 교회를 떠나기도 했으나, 다시 돌아와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반주골에 안장되었던 이승훈의 유해는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 권철신 · 일신 형제,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다.

반주골의 이승훈 베드로 묘는 2011년 12월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100여 년의 박해시대를 거친 한국 천주교회에는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3만 명의 순교자들이 있지만 이름 정도라도 알려진 순교자는 약 1,000여 명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이름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2002년 인천교구는 강화도의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내에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해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에게 봉헌하였다.

현양동산에는 성모당, 십자가의 길, 순교자 현양당, 전국 유명 성지의 상징물이 있는 순교자의 길, 무명 순교자상, 무명 순교자 현양탑, 묵주 연못 등이 조성되었다. 2005년 11월 3일 무명관 2층에 ‘일만위 순교자 기념성당’이 마련되었고, 성당 내에는 홀로 기도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개인 성체조배실도 만들었다. 2007년 6월에는 ‘주님 위로의 동산’과 ‘순교자의 십자가 길’이 조성되었고, 2007년 10월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남종삼 요한 성인의 유해 일부를 모신 ‘성 남종삼 기념관’도 건립했다. 2018년 11월에는 침묵 순례를 돕기 위해 혼자 걷는 묵주기도 4 신비길도 조성해 축복식을 거행했다.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은 ‘순교자를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위한 곳이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통해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는 ‘길’을 찾고 배우는 ‘신앙의 학교’이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누구나 편하게 찾아와 기도하고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성지’이다.

 

제물진두 순교성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제물진두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오페르트의 무덤 도굴사건 그리고 서양세력의 침공과 관련해 천주교 신자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척사 의식을 고양하려는 정부에 의해 인천 지역 최대 순교지가 되었다. 1868년 4월,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의 이모인 김씨와 남편 손 넙적이 베드로, 사위 백치문 사도 요한,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71년 5월에는 이승훈의 증손자 이연구와 이균구 형제, 이승훈의 손자 이재겸의 부인 정씨와 그의 손자 이명현, 신자로 추정되는 백용석과 김아지도 체포되어 이곳에서 함께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성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하여 1년여간 조선교회의 사정을 둘러본 후, 1845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위해 작은 목선을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났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또한 1888년 7월 22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4명의 수녀가 이곳 제물포항을 통해 순교자의 땅인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진무영 순교성지

진무영은 숙종 때 해안 방어를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강화도와 그 주변 군사들을 함께 엮어 창설한 군영이었다. 1866년 병인양요를 계기로 그 기능이 확대되었고, 양인과 내통한 혐의로 1868년 음력 5월 장치선, 최영준, 박 서방, 조 서방 등이 순교하면서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지가 되었다. 특히 장치선과 최영준은 리델 신부를 안전하게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박해의 상황을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고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고자 했다. 현재 강화 성당 구내에 진무영 순교성지가 조성되어 있으나 진무영 터가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재 옛 강화 농협 자리에 있는 은혜 교회부터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는 강화 성당까지를 진무영 터로 추정하고 있다. 강화 본당은 2004년 성당 구내에 성지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황사영 생가터

강화읍 월곳리 대금동은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帛書)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황사영은 명문가 태생으로 어려서 신동으로 불릴 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고,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듣고 입교하여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전국에 신유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몰아쳐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고 이승훈, 정약종 등 조선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이 순교하자 황사영 역시 충북 배론으로 몸을 숨겼다. 조선 교회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황사영은 토굴에서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어 황사영도 관헌에게 붙잡혔다. 결국 황사영은 대역 죄인으로 참수되었고, 그의 가족들 역시 흩어져 유배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황사영의 생가터에 대해서는 기존의 ‘강화도 생가설’과 ‘서울 아현 생가설’로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그 이유는 황사영 생가터와 관련된 문헌의 기록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는 이기경(李基慶)의 “벽위편(闢衛編)”에 기록되어 있는 서울 ‘서부 아현 태생’(胎生於西部阿峴)이 더 인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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