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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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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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곡리 성당 갈곡리는 옛날부터 칡이 많아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렸고, 순수 우리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홍천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칠울 인근 우골에 정착해 살다가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칠울로 이주해 왔다.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 일대에 교우들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차츰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마재 성가정 성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마재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신앙의 태동지이다. 4형제 중 정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오른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바로 이곳 마재에서 태어났다.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 장흥면 울대리의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부친 남상교, 유배지에서 치명한 아내 이조이와 막내아들 남규희의 묘가 있다. 남종삼은 103위 한국 성인 중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으로 부친 남상교의 영향으로 일찍이 천주교 교리를 알고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승지까지 오른 남종삼은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관리들의 시기와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이 양립할 수 없게 되자 관직을 내놓고 부친이 은거하던 묘재로 내려갔다. 신암리 성당 신암리는 구한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와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의 하나로 의정부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된 곳이다. 1909년 개성 본당의 관할 공소로 설립된 후 1925년 3월 본당으로 승격되어 1927년 5월 최문식 초대 주임신부가 부임했다. 그러나 본당의 여건이 어려워 1930년 본당이 폐지되고 행주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1935년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가, 1945년 덕정리 본당이 의정부로 이전하고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나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신암리 신자들은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했다. 1959년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되어 신앙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는 등 다난한 역사를 걸어왔다. 양주 순교성지 박해시대 경기도 북부 지역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나 박해가 진정되고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재건 속도가 빨라져 1830년대 초 고양(高陽) 지역에선 70-90명 규모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양주 관아는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졌다. “치명일기”에 의하면 바로 이곳에서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김 마리아, 박 서방 등 5명이 순교했다. 양주 관아는 1506년 현재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동)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간 양주목(楊州牧)을 관할한 행정관청이었다. 양주시는 1997년 양주목사의 집무처인 동헌(매학당)의 복원을 시작으로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반영하여 2017년 동헌부의 부속건물과 내아를 복원했다. 의정부 주교좌성당 의정부 주교좌성당은 1945년 12월 덕정리 본당을 이전하며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설립되었고, 1980년 의정부 4동(현 의정부 1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의정부 2동 본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되면서 주교좌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다시 변경하였다. 행주 성당 행주 성당은 1899년경 약현 본당 관할로 설립된 행주 공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행주 포구는 한강을 통한 수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거주 인구가 많았다. 그래서 신자수의 증가로 1909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김원영 신부는 1910년 8월에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고, 1922년 성당을 증축하면서 사제관도 신축하였다.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던 1942년 한때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8년 본당으로 부활되었다. 하지만 도시화로 신자수가 감소하자 1957년 수색동으로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이름을 ‘수색동 본당’으로 바꾸면서 행주 본당은 재차 공소가 되었다. 그 후 1982년 설립된 능곡 본당 공소로 있다가 2004년 의정부교구 설립과 함께 그해 11월 18일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은 어렵게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묘를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다.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토시)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