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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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12 15:43
의정부 교구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갈곡리 성당

갈곡리는 옛날부터 칡이 많아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렸고, 순수 우리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홍천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칠울 인근 우골에 정착해 살다가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칠울로 이주해 왔다.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 일대에 교우들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차츰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갈곡리 성당은 1898년 약현(현 중림동약현) 본당 칠울 공소로 설립되어, 1901년 송도(개성) 본당 공소, 1923년 신암리 본당 공소, 1934년 덕정리 본당 공소, 1947년 의정부 본당 공소, 1963년 법원리 본당 공소, 2018년 법원리 본당에서 분리해 준본당으로 신설되었다. 1951년 6.25 전쟁 중 1936년에 마련한 공소 강당이 소실되자 당시 미군 해병대 군종이었던 에드워드 마 신부의 도움을 받아 1955년 현재의 의정부 주교좌성당을 본뜬 공소 성당을 건립했다. 2008년에는 기존의 낡은 칠울 강당을 개보수하여 단체 피정이나 연수가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마재 성가정 성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마재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신앙의 태동지이다. 4형제 중 정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오른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바로 이곳 마재에서 태어났다.

다산 정약용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당쟁의 와중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스스로 천주교를 떠났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고,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실학을 집대성했지만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하며 형 정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긴 유배 생활 중 신심을 되찾은 정약용은 유배에서 돌아온 후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보속의 삶을 살다가 여항덕 파치피코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

장흥면 울대리의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부친 남상교, 유배지에서 치명한 아내 이조이와 막내아들 남규희의 묘가 있다. 남종삼은 103위 한국 성인 중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으로 부친 남상교의 영향으로 일찍이 천주교 교리를 알고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승지까지 오른 남종삼은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관리들의 시기와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이 양립할 수 없게 되자 관직을 내놓고 부친이 은거하던 묘재로 내려갔다.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었고, 당시 수시로 러시아가 침범해 통상을 요구하자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묘재로 가서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듣고,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성사를 받은 후 한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었다. 의금부로 압송된 남종삼은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신암리 성당

신암리는 구한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와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의 하나로 의정부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된 곳이다. 1909년 개성 본당의 관할 공소로 설립된 후 1925년 3월 본당으로 승격되어 1927년 5월 최문식 초대 주임신부가 부임했다. 그러나 본당의 여건이 어려워 1930년 본당이 폐지되고 행주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1935년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가, 1945년 덕정리 본당이 의정부로 이전하고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나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신암리 신자들은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했다. 1959년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되어 신앙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는 등 다난한 역사를 걸어왔다.

 

양주 순교성지

박해시대 경기도 북부 지역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나 박해가 진정되고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재건 속도가 빨라져 1830년대 초 고양(高陽) 지역에선 70-90명 규모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양주 관아는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졌다. “치명일기”에 의하면 바로 이곳에서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김 마리아, 박 서방 등 5명이 순교했다. 양주 관아는 1506년 현재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동)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간 양주목(楊州牧)을 관할한 행정관청이었다. 양주시는 1997년 양주목사의 집무처인 동헌(매학당)의 복원을 시작으로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반영하여 2017년 동헌부의 부속건물과 내아를 복원했다.

 

의정부 주교좌성당

의정부 주교좌성당은 1945년 12월 덕정리 본당을 이전하며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설립되었고, 1980년 의정부 4동(현 의정부 1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의정부 2동 본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되면서 주교좌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다시 변경하였다.

1953년 이계광 신부는 성당으로 쓰던 한옥이 소실되자 미군 1군단과 군종신부의 도움으로 1953년 11월 현 사적지 성당을, 다음 해 3월 유치원 건물을 완공하였다. 1957년 건립된 성모병원은 1976년 가톨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등록돼 경기도 북부지역의 유일한 종합병원이자 최대 규모의 병원으로 발전했다. 1995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기념 미사와 “의정부 본당 50년사”를 간행했고, 2002년 1월 성당 건물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행주 성당

행주 성당은 1899년경 약현 본당 관할로 설립된 행주 공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행주 포구는 한강을 통한 수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거주 인구가 많았다. 그래서 신자수의 증가로 1909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김원영 신부는 1910년 8월에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고, 1922년 성당을 증축하면서 사제관도 신축하였다.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던 1942년 한때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8년 본당으로 부활되었다. 하지만 도시화로 신자수가 감소하자 1957년 수색동으로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이름을 ‘수색동 본당’으로 바꾸면서 행주 본당은 재차 공소가 되었다. 그 후 1982년 설립된 능곡 본당 공소로 있다가 2004년 의정부교구 설립과 함께 그해 11월 18일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행주 성당은 2009년 5월 31일 ‘본당 승격 100주년 기념미사’와 ‘100주년 역사 기념관’ 기공식을 가졌다. 3년여의 공사를 통해 100주년 기념관 성모의 집은 본당의 역사를 느끼며 쉬어갈 수 있는 쉼터와 유물전시실, 교구사제 숙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1910년 소박한 한옥 형태로 지어진 행주 성당은 1928년 인근의 현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기존의 자재를 대부분 재활용했고, 1949년 증축하면서 기록한 자료 등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건물의 뼈대를 구성하는 목조가구의 경우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는 대표적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되어 2010년 2월 19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건물도 낡고 변형되어 2013년부터 복원작업을 추진해, 역사적 고증과 자문을 거쳐 100년 전의 모습을 복원해 2015년 12월 복원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은 어렵게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묘를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다.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토시)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로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면서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러운 일생을 선택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령이 내려지자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옹기가마 토굴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박해 상황을 기록하던 중, 그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작은 붓으로 명주 천에 적었는데,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가 발각되어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그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의정부교구는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해 사패산을 넘어 남종삼 성인 묘역과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까지 순례하는 ‘순교자의 길’을 개발해 송추 성당을 중심으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순례와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18년 8월에는 송추 성당을 남종삼 요한 성인과 가족 순교자 묘소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순례지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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