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교구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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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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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 성지 요당리 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양간 공소라 불리던 교우촌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바닷물이 유입되어 뱃길이 열렸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의 요람지였다. 은이 성지 은이 마을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1836년 15세의 소년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였다. 성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이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모방 신부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 또한 은이 공소였다. 이윤일 요한 묘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이윤일 성인은 1912년 묵리의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76년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 모셔졌다. 그 후 성인의 유해임이 밝혀져 1987년 순교지인 대구 관덕정으로 이장되었다. 이곳 순교사적지는 바로 이윤일 성인이 64년간 묻혔던 곳으로 표지석 옆의 민가를 왼쪽에 끼고 산길로 약 580m 올라가면 있다. 아담한 묘역에 이르면 가운데 성인의 묘가 있고, 그 옆에는 이곳이 성인의 성해를 모셨던 거룩한 곳임을 알리고 성인의 신앙을 배우고 전하기 위해 대구대교구 이문희 주교가 세운 성인 유지비(遺址碑)가 있다. 그리고 성인 묘 앞 뒤로 성모상과 십자가, 야외미사를 위한 돌제대가 준비되어 있다. 죽산 순교성지 죽산은 조선 시대 이미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가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순교성지이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4명이나 된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이 죽산 도호부에서 심문을 받고 모진 매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며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깃발을 올렸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년 9월 28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병인박해 이후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없었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준다. 천진암 성지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당대의 석학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 일신 형제와 정약전 · 약종 ·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들은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에게 그리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들에게 세례를 주고,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켜 수도 한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다. 하우현 성당 하우현 성당은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앙인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8년 갓등이 본당 설립과 함께 갓등이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갓등이 본당 2대 주임인 알릭스 신부님은 교우들이 공소 강당도 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예절을 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추진하여 1894년 초가목조강당 10칸을 건립했다.1900년 본당으로 승격된 후 1954년 다시 안양 본당 공소로 전환되었고, 1965년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성당의 붕괴 위험을 알고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1975년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하우현 공소가 본당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덕골 한덕골(閑德洞)은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敎友村)을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한국인으로는 첫 번째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충남 당진군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피난 왔던 곳이다. 또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귀국하여 어린 동생들을 눈물로 상봉하고 가끔 들러 성사를 주던 곳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