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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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12 15:13
수원 교구 3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요당리 성지

요당리 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양간 공소라 불리던 교우촌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바닷물이 유입되어 뱃길이 열렸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의 요람지였다.

장주기 성인과 복자 장 토마스의 출생지이자 신앙의 터전이었고, 그 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교회 재정 확보를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그 책임을 맡았던 민극가 성인과 공소회장을 역임한 정화경 성인이 활동했던 곳이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성 앵베르 주교와 그분의 피신을 도운 손경서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순교사적지로서의 이런 중요성으로 인해 수원교구는 2006년부터 전담사제를 파견해 성지 개발을 본격화했다. 기도의 광장 양편으로 묵주기도 길과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성역화 광장에는 대형 십자가와 요당리와 관련 있는 순교자들의 의묘를 조성했다. 그리고 2009년 성당과 부속건물들을 완공해 다음 해 5월 봉헌식을 가졌다.

 

은이 성지

은이 마을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1836년 15세의 소년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였다. 성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이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모방 신부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 또한 은이 공소였다.

은이 공소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양지 성당은 1996년 그동안 방치되었던 은이 공소터 일부를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성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면서 성지 개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이어 2002년과 2003년에 주변 땅을 추가 매입하고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 등을 마련하였다. 이어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이윤일 요한 묘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이윤일 성인은 1912년 묵리의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76년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 모셔졌다. 그 후 성인의 유해임이 밝혀져 1987년 순교지인 대구 관덕정으로 이장되었다. 이곳 순교사적지는 바로 이윤일 성인이 64년간 묻혔던 곳으로 표지석 옆의 민가를 왼쪽에 끼고 산길로 약 580m 올라가면 있다. 아담한 묘역에 이르면 가운데 성인의 묘가 있고, 그 옆에는 이곳이 성인의 성해를 모셨던 거룩한 곳임을 알리고 성인의 신앙을 배우고 전하기 위해 대구대교구 이문희 주교가 세운 성인 유지비(遺址碑)가 있다. 그리고 성인 묘 앞 뒤로 성모상과 십자가, 야외미사를 위한 돌제대가 준비되어 있다.

 

죽산 순교성지

죽산은 조선 시대 이미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가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순교성지이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4명이나 된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이 죽산 도호부에서 심문을 받고 모진 매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며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깃발을 올렸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년 9월 28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병인박해 이후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없었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준다.

이처럼 거룩한 순교터에 변변한 기념비 하나 없어 안타까워하던 죽산 성당 신자들은 포도를 팔아 모은 돈으로 죽산 도호부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나 잊은터로 불리며 처형지로 사용되었던 곳의 땅을 확보하여 성지 개발을 시작했다. 죽산 순교성지는 개발 단계부터 가톨릭교회의 성체 · 성모 ·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풍스런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지 가장자리로 묵주기도 길이 있고, 묘역 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와 순교자 현양탑이 날개처럼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 묘역 뒤로는 십자가상과 십자가의 길, 소성당 그리고 옆에 대성당을 마련하여 2000년 9월 3일 최덕기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2016년 9월 28일에는 죽산 순교성지에서 3.5km 거리에 있는 죽산면사무소 입구 쪽에 조성한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선포 및 축복식을 거행했다.

 

천진암 성지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당대의 석학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 일신 형제와 정약전 · 약종 ·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들은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에게 그리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들에게 세례를 주고,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켜 수도 한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다.

한국 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는 오랫동안 잊혀오다가 1960년에 와서야 그 가치가 드러나 1980년 천진암 일대 부지를 매입하여 그 초입에 가르멜 수녀원을 설립하고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 일신 형제의 묘를 이벽의 묘 옆으로 이장해 창립 선조 묘역을 마련했다. 그리고 성지 입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정하상과 유진길 성인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성직자 영입 운동과 조선 독립교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순교성인들이다.

 

하우현 성당

하우현 성당은 이미 1800년대 초반부터 박해를 피해온 신앙인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8년 갓등이 본당 설립과 함께 갓등이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갓등이 본당 2대 주임인 알릭스 신부님은 교우들이 공소 강당도 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예절을 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추진하여 1894년 초가목조강당 10칸을 건립했다.1900년 본당으로 승격된 후 1954년 다시 안양 본당 공소로 전환되었고, 1965년 은퇴 후 하우현에서 휴양하던 김영근 베드로 신부님이 성당의 붕괴 위험을 알고 미군 부대로부터 건축 자재를 원조받아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1975년 군포(현 호계동) 본당 관할공소로 변경되었다가 1978년 하우현 공소가 본당으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3년 하우현 공소 건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고, 2001년 1월에는 초대주임인 샤플랭 신부가 세운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이어 2004년과 2005년에 사제관 보수 공사와 조경 공사를 시행하였고, 2012년 성당 뒤편에 성모동산과 묵주기도 길 등을 조성하였다. 1906년에 건립된 사제관은 그 몸체가 서양식 석조 양식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골기와를 이은 전통 한국식으로 20세기 초반에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이 혼용된 드문 경우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그리고 사제관 앞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서 루도비코 볼리외 성인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다. 성인께서 주로 하우현 인근에서 사목하시다가 청계산의 둔토리 동굴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셨기 때문이다.

 

한덕골

한덕골(閑德洞)은 박해시대 천주교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敎友村)을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한국인으로는 첫 번째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충남 당진군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를 거쳐 피난 왔던 곳이다. 또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귀국하여 어린 동생들을 눈물로 상봉하고 가끔 들러 성사를 주던 곳이기도 하다.

교회사 연구와 성지개발에 각별한 열정을 지닌 인천교구의 고 김진용 씨는 한덕골을 발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한덕골 순교사적지 부지 또한 손수 매입하여 수원교구에 기증했다. 순교사적지를 관리하는 천리요셉 성당은 대형 십자가와 야외제대, 그리고 양옆으로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상을 설치했고, 2010년 5월에는 파티마의 성모상을 설치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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