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교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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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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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골(범골) 1885년 10월 28일 경기도 여주군에 개교한 예수 성심 신학교는 온갖 수난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성소를 키워 내 오늘날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있게 한 모태이다. 조선 교구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는 당시 국내 사정이 여전히 불안하고 인원도 부족해서 신학교의 설립을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페낭 신학교의 한국 학생들이 그곳의 기후와 풍토를 이겨 내지 못하고 1884년 일부 귀국하자 신학교 설립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개교한 부엉골의 예수 성심 신학교는 임시로 초가 몇 칸을 매입해 신학교를 세우고 페낭에서 돌아온 학생 4명과 조선에서 입학한 3명을 포함해 모두 7명의 신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부엉골 신학교는 그리 오래 운영되지 못하고,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개교 2년 후인 1887년 서울 용산으로 이전했다. 손골 성지 손골 성지는 원래 교우촌이 있던 곳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주된 선교지로,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사목하다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홀로 포졸들에게 체포된 곳일 뿐 아니라 성 오메트르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한국말과 풍습 등을 배우며 선교를 준비하고 활동하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동상, 십자가의 길, 경당과 기념관, 피정의 집, 도리 신부 순교비가 건립되었다. 수차례 변형 후 2014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된 도리 신부 순교비 위에는 1966년 성인의 고향 본당에서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성인의 생가 벽에 나머지 하나는 손골에 기증한 돌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다. 2013년 10월에는 손골에서 신앙생활하다 체포되어 서봉 인근 개울가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 4위의 유해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서 손골 성지로 옮겨 안치하고 순교자의 길을 조성하였다. 2015년 3월에 성 오메트르 신부 동상을 세우고, 2016년 5월에는 성지 설립 50주년과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해 새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이어 2017년 5월 기존의 경당을 보수해 손골 기념관을 개관해 성지와 성인 관련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수리산 성지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했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 불렸다. 박해시대 외부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했던 수리산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의 묘가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으로 3대째 신앙을 지켜왔으나 장남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고 전교회장직을 맡아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수원 성지(수원 화성, 북수동 성당) 다산 정약용이 설계와 시공을 담당한 수원 화성은 그 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의 처형지가 되었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당한 신자들이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순교한 곳이다. 둘레 5743m에 이르는 성곽 전체가 이름이 알려진 83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껴안은 순교지다. 현재까지 화성 내부 십여 곳 이상이 순교지와 증거지로 확인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시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2000년 수원 화성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북수동 성당(구 수원 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 수원 성지를 선포하였다. 수원 성지는 2차 시복시성 대상자로 선정된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중 수원에서 순교한 17위의 하느님의 종과 무명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안성 성당(구 구포동 성당) 박해시대에 이미 복음이 전파된 안성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를 전후해서 여러 곳에 신자들이 거주했다. 그러나 박해로 공동체가 와해되고 훗날 순교자들의 후손이나 다른 지역 신자들이 이주해오면서 새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883년 두세 신부가 안성 지역을 방문하여 바울 공소를 설립하고, 죽산과 직산 그리고 궁말과 선바위 공소를 차례로 설립했다. 1900년 1월 뮈텔 주교가 이 지역을 방문한 후 본당 설립 운동이 시작되어 안성읍내에 현 부지를 매입한 후 기와집을 성당으로 개조하여 그해 9월 드비즈 신부의 집전으로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어 10월 19일 안성 본당이 설립되었다. 양근 성지 양근(楊根)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남한강 변에 폭우와 홍수로부터 제방의 붕괴를 막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권철신과 권일신이 태어난 곳이다.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 후 이승훈은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된 이존창과 유항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들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조과, 만과, 성로신공 기도 등을 바치며 천주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가성직제도 하에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어농 성지 어농 성지에는 한국 교회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중국을 세 번이나 왕래한 윤유일 바오로와 그 일가족의 묘가 있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던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순교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윤유일의 가족 대부분이 순교하여 후손을 찾지 못하던 중 1987년에 한 후손이 나타나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과 윤관수, 그의 사촌 누이동생 윤점혜와 윤운혜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주문모 신부 등의 의묘를 만들었고, 그 해 6월 28일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를 시작했다. 왕림 성당 왕림 성당을 상징하는 ‘갓등이’는 갓을 쓴 등불이라는 뜻으로 사제를 의미하는 박해시대 왕림 교우들이 사용하던 은어였다. 갓등이 지방의 복음 전파 시기와 교우촌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839년 앵베르 주교의 일기에 ‘갓등이 공소’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88년 7월 종현(현재의 명동, 1882년 설립), 원산(1887년 설립) 본당에 이어 한국 교회의 세 번째 본당이자 한수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으로 수원교구의 뿌리가 된 왕림 본당은 조선시대 선교사들이 충청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으로 교역과 교통의 요충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