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교구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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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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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배마실 성지 골배마실 성지는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교우촌이다. 김대건 신부 가족은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으로 와 골배마실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소년 김대건은 부모로부터 신앙생활과 교리를 배워 1836년 15세의 나이로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신학생을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845년 사제품을 받고 국내로 잠입한 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적인 재회를 한 곳도 골배마실이다. 김대건 신부가 성장한 집터에는 성인 동상과 야외제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구산성지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이자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교우촌인 구산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구산에서 태어난 김성우 성인은 36세에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성인은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고, 1840년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성인은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남양 성모 성지 남양 성모 성지는 초대 교회의 교우촌이자 처형지로 1991년 10월 7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모 성지로 선포된 곳이다. 남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해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 많은 교인들이 찾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백학, 활초 등 많은 교우촌이 인근에 형성되어 있었다. 옹기를 구워 팔던 백학 교우촌에서 가마터와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교우촌은 왕림과 큰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안양 수리산, 양지 골배마실, 안성 미리내, 진천 배티, 아산 걸매리 등과 걸어서 하루거리에 위치해 박해 당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제 순교자는 2~3백 명으로 추산)이 순교한 곳이다. 현재의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2년(1624년) 때 중건한 것으로 후금국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계기로 2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두 군데로 서쪽으로는 성남 방면, 동쪽으로는 광주 방면으로 연결된다. 단내 성가정 성지 단내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박해의 회오리가 단천리 교우촌에 몰아쳤을 때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고,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에는 마을 뒤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올라갔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갔고,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양묵 베드로가 병든 작은 할아버지를 모시고자 자진하여 잡혀갔다. 배교 강요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그들은 그해 말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다. 그러나 정양묵 베드로의 시신은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다. 둔토리(서 루도비코 신부 은신 동굴)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와 의왕시를 잇는 342번 지방도로 중간쯤에서 위로 올라가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 밑의 터널을 지나 국사봉 등성이를 오르면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서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었던 동굴이 나온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 중 가장 어린 26세에, 조선 땅에 발을 들인 지 겨우 9개월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증거하며 혹독한 고문 끝에 순교한 성인의 열정과 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다. 희광이의 세 번째 칼날에 그의 목은 떨어지고 머리는 사흘 동안 효수되었다가 몇몇 교우들이 시신을 거두어 왜고개로 옮겼다. 이후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명동 성당 지하묘소를 거쳐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에 안치되었다.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순교사적지인 은신 동굴로 오르는 산길에는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고, 작은 동굴 안에는 성모상과 예수상, 십자가와 촛대 등이 놓인 작은 바위가 있다. 미리내 성지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미리내 성지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883년 공소가 설립되었다가 189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1907년 초 성 요셉 성당이 건립되었다. 1976년 성직자 묘지 상단에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 17위의 유해를 이장해 모셨는데, 그 중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대구대교구로 천묘했다. 16위의 유해 중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가 2013년 손골 성지로 이장되어 현재는 12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합장되어 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에는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경당 앞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다. 경당 밖 왼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목숨을 걸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모시고 밤낮으로 돌본 이민식이 나란히 누워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