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교구3 |
---|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
수리치골 성모 성지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로,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이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리치골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고 주교에 의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구성되어 공주 지방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신리 무명 순교자 묘 신리 성지 인근 대전리(大田里)의 한 공동묘지에는 46기의 무명 순교자 묘가 줄무덤을 이루고 있다. 1972년 봄 손자선 성인의 선산이던 이곳이 과수원으로 개발되는 와중에 연고자가 없는 32기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이때 한결같이 분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과 묵주가 함께 나왔다. 이들 시신은 당시 신자들에 의해 1km 떨어진 현 공동묘지에 6개의 봉분으로 이장하여 모셨다. 그리고 1985년 4월 2차 파묘 때 14기의 무연고 묘가 또 발굴되었다. “대전리에 있는 십수 기의 묘는 손씨 가문의 치명자”라는 구전(口傳)이 있던 터에 십자가와 함께 발굴된 이들 14기의 묘는 손자선 성인의 가족 순교자로 전해졌고, 현재 무명 순교자 묘 뒤편으로 옮겨 모셨다. 신리성지 신리 성지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이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인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머물며 내포지방의 선교활동을 지휘하던 주교관이자 교구청으로 사용된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이곳에서 다블뤼 주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행적과 교회사를 정리하여 “비망기”(備忘記)를 작성해 파리로 보냄으로써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사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교회서적을 집필하고 출판함으로써 근대적 출판 인쇄를 시작하였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주교관 인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갖은 고문 끝에 보령 갈매못에서 성 금요일에 순교하였다. 신평성당 신평 성당 내에는 1989년부터 2009년까지 11월까지 신평 원머리(한정리) 출신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의 묘소가 있었다. 2009년 순교자 현양과 원머리 순교사적지 개발을 위해 두 순교자의 유해를 본래의 자리인 원머리로 재이장했다. 현재 신평 성당 내에 두 순교자의 묘소가 있던 자리에는 순교자 기념비를 세워 두 분의 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2000년에 새로 건립된 성당 또한 곳곳에서 순교자들의 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 여사울성지 여사울 순교사적지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서북 지역을 지칭하는 내포 지역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생가 터가 있는 곳이다. 상당한 경제력을 지닌 양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존창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선교에 매진할 뿐만 아니라, 가성직제도의 어긋남을 깨달은 뒤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배교를 하기도 했지만 그 뒤 홍산으로 이사한 후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고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그 어느 곳보다 교세가 커졌고 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된 이존창은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렇듯 여사울은 초기 내포 천주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로서 대전교구의 뿌리가 된 곳이다. 예산성당 예산 성당은 1927년 합덕 본당에서 분리 신설되었다. 1928년 부임한 제2대 황정수 요셉(1928년 5월 - 1943년 12월) 주임신부는 1933년 본당 신축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을 완공하여 1935년 9월 12일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예산 성당은 전형적인 삼량식(三樑式) 성당 건축으로 외관의 구성은 단순하나 처마돌림 띠, 창 둘레 아치 장식 등의 비례가 뛰어난 근대 성당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인 신부에 의해 건립된 건축물로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매우 높으며, 일본의 건축문화를 수용하였으나 혼재하지 않고 서양의 건축문화를 직접 수용하여 토착화한 건축양식으로서 근대 건축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이런 이유로 성당과 사제관 건물이 2004년 4월 1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요골공소 요골 공소는 1883년 충청도 지방 사목을 전담했던 두세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고, 두세 신부가 아산 공세리 성당에서 공주 공소로 가기 전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렀을 정도로 활발한 신앙공동체였다. 헌신적인 공소회장들과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곳이었으나, 도시화의 영향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교통 등의 발달로 인해 현재는 유구 본당의 한 구역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원머리성지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 원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가 원머리로 변형된 것으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이 염판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살던 교우촌이었다.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원머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는 무진년(1868년)에 수원 감옥에서 순교했다.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 삽교 성당 관할구역인 용동 3리의 배나드리 교우촌 인근 용동 2리, 일명 하룡 마을에는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가 있다. 이곳은 본래 예산 본당 관할의 주례 공소 강당이 있던 곳이었으나 1967년 예산 본당에서 삽교 본당이 분가되면서 공소가 폐지되고 강당이 헐리게 되자 공주에서 체포되어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를 기념하는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용동리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순교자께 영광”이란 글귀를 새긴 돌과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고, 십자가 모양으로 조성한 정원 한 가운데 육중한 자연석으로 만든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