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나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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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나드리 순교사적지는 예산군 삽교읍 북쪽 용동 3리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하였다. 이곳은 삽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1.3km)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리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1817년 이곳에도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 갔고, 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이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산막골 작은재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자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무덤 터가 2010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같은 사실은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가 발간한 “박해기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 자료집을 통해 밝혀졌다. 자료집에 따르면 천방산 산막골(현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은 신앙 선조들이 1839년 기해박해 이후 군란을 피해 인적 없는 산간벽지에 숨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곳이자 다블뤼 주교와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밝혀졌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들이 심한 형벌을 받고 피를 흘렸던 점으로 보아 순교 사적지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곳은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충청북도 연풍에서 이주해 와 1866년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참회와 보속의 삶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8번지의 천방산 기슭은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와 판교면 금덕리의 작은재 공소 터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살다간 숱한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1994년 산림도로 개설과 함께 줄무덤 터는 콘크리트에 묻히고 말았으며, 당시 공사현장에서 숱한 유골과 함께 발굴된 십자가와 묵주 등 성물도 연고자가 없어 인근에 다시 묻혔으나 그 위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삽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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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황석두 루카 성인을 안장했던 교우촌
부여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과 북쪽 계곡에는 조선시대에 교우들이 숨어 살면서 삽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삽고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에도 교우들이 숨어 살았는데 이곳에 ‘삽티 교우촌’이 있었다.
1850년대에 충북 괴산 연풍에 살던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가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는데, 양자인 황천일 요한과 조카인 황기원 안드레아가 이 교우촌에서 살았다. 황석두 루카 성인은 산막골에서부터 가끔 삽티에 찾아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병인박해로 인해 1866년 3월 30일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시신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수습하여 삽티에 안장하였다. 하지만 1866년 말 황천일과 황기원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을 안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홍산현에 체포되고 서울에 이수되어 무참히 처형당했다. 이로 인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이 안장된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1962년 삽티 일대를 개간 작업하던 외교인들이 스러진 묘터에 묻혀 있는 항아리 속에서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묵주 등 성물을 발굴했다. 그 발굴지점을 교회사학자들은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라 신빙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장 신빙 지점은 1990년대에 타지인들의 문중묘역으로 바뀌었다. 당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 서울 절두산 성지의 순교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2012년 윤종관 신부는 성물 발굴지에서 분할된 지번의 산지를 매입하고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2016년 성지 조성을 시작하였다.
상흥리 공소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공소는 과거 ‘가재 공소’로 불렸다.
가재 공소는 1890년 양촌 본당(현 합덕 본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가 1908년 수곡 본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17년 수곡 본당(홍성군 구항면 공리) 주임으로 임명된 안학만 신부는 서산군 팔봉면 금학리(소길리)로 본당을 이전했고,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에 소집되었다가 돌아와 금학리 본당을 다시 맡은 폴리 신부는 1920년 본당을 금학리에서 상홍리로 이전하여 전통 한옥 목조 양식의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다음해에 완공했다.
1932년 10여 년간 재임하면서 본당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멜리장 신부가 옥천 본당으로 가고 바로 신부가 부임했다. 바로 신부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순교자 유해를 발굴 · 안장한 것으로,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목격 증인들을 수소문했다. 1935년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를 한 후 신자들과 함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던 해미면 조산리 일대를 발굴하여 유해와 성물을 수습한 후 상홍리 성당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안장했다.
바로 신부는 서산 읍내로 본당을 이전하기 위해 현 서산동문동 성당 부지를 매입해 본당을 이전하고 1936년 여름 성당과 사제관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10월 축복식을 가졌다. 본당이 서산으로 이전함에 따라 상홍리 본당은 17년 만에 다시 공소가 되었다. 1935년에 조성된 순교자 묘역을 성역화하기 위해 동문동 본당과 상홍리 공소는 천묘 20주년이 되는 1955년 순교탑을 건립했다. 대전교구는 해미읍성과 그 인근 지역을 순교성지로 조성하기 위해 1975년 해미에 순교탑을 세우고, 1982년에는 읍성 내 감옥터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으며, 1984년에는 순교자들의 생매장터를 매입했다. 1995년 9월 상홍리에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다시 해미 성지로 모셔와 해미 순교탑 아래에 안장했다.
서산동문동 성당
서산 지역 신앙 공동체는 합덕 본당 산하 공소로 출발했습니다. 1908년 폴리 신부가 서산 지구 본당을 홍성군 구항면 공리에 설립한 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본국으로 돌아가자 다시 합덕 본당에 합병되었습니다. 1917년 안학만 신부가 서산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본당을 팔봉면 금학리로 옮겼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 폴리 신부가 다시 주임으로 부임하여 1919년 현재의 상홍리 공소 자리에 강당 및 사제관을 신축했습니다.
두 차례의 본당 이전 후 1932년 바로 신부가 현 부지를 매입하여 1937년 10월 성당을 신축 · 완공했습니다. 1950년 6 · 25 전쟁 중에는 콜랭 신부가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대전으로 압송 도중 폭격을 당해 행방불명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는 서산동문동 본당은 1935년 해미 하천변에 생매장되어 있던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물을 발굴하여 상홍리에 있는 순교자 묘지에 안장했습니다. 해미 본당 설립 이후 상홍리에 임시 안장된 해미 무명 순교자 유해는 1995년 9월 해미 성지로 이장되었습니다.
바실리카 평면 구조에 입면은 장식을 지극히 간략화한 고딕 양식의 교회건축물인 서산동문동 성당은 2007년 4월 30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2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해 7월에는 바로 신부의 신심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당 뒤편에 ‘바로 동산’을 조성해, 십자가의 길과 바로 신부의 묘비 및 콜랭 신부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서짓골 성지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남도 보령시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 위앵 신부, 황석두 · 장주기 회장이 순교한 후 황석두 성인의 유해는 일가에 의해 홍산 삽티에 안장되었고, 나머지 네 성인의 유해는 서짓골에 사는 이화만 바오로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용감한 도앙골 교우촌 신자들의 도움으로 처형장에서 오포리 야산의 두 번째 무덤을 거쳐 그해 여름 배편을 이용해 서짓골의 담배 밭에 이장하여 모셨다. 네 순교성인의 유해는 1882년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졌다가 1894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1900년 명동 성당 지하묘역을 거쳐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되었다. 서짓골 성지는 15년 6개월 동안 네 순교성인이 머문 세 번째 무덤으로 순교자들의 피와 살, 잔뼈들이 진토가 된 거룩한 순교사적지다.
서짓골은 부여 금사리 본당의 고 정규량 레오 신부가 1925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기념하며 그 위치를 확인하였지만 이후 교회사에서 잊힌 땅이 되었다가 2007년부터 부여 만수리 공소에 윤종관 신부가 상주하면서 다블뤼 주교의 주 사목지이자 수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하부 내포 지역이 알려지게 되었다. 2012년 1월 대전교구에서 하부 내포 지역을 성지로 선포하고 윤종관 신부를 전담으로 임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성역화가 이루어져 2013년 10월 서짓골 성지 봉헌식을 거행했다.
성거산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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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서 차령산맥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보기 드문 곳이다. 성거산 주변에는 박해 당시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교우촌)이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으로 서덕골, 먹방이, 소학동,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이 있었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가 은거했던 곳이고, 박해가 끝난 뒤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이다.
또한 병인박해 때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이다. 그 중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공주 감영에서 참수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배문호 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되었다. 성지 전체로는 제1줄무덤에 38기, 제2줄무덤에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있어 실제 안장된 순교자는 훨씬 많다고 한다. 1959년 미군의 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 상의 묘봉 수가 107기였다고 하니, 이곳은 내포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순교를 당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다.
솔뫼성지
솔뫼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1846년 순교)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고,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