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교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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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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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순교성지 서해안 바닷가에 있는 갈매못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 위앵 신부 그리고 황석두 · 장주기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66년 3월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다블뤼 주교는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고 국혼도 가까운 시기여서 서울에서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으로 처형지가 옮겨졌다. 이들 4명과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 요셉까지 합세하여 모두 다섯 명이 갈매못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되었다. 성금요일에 순교한 다섯 성인 중 황석두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인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넷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했다가 그해 여름 용맹한 교우들에 의해 보령의 현 서짓골 성지에 안장되었고, 이후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졌다. 강경 성지성당 2021년 탄생 200주년을 맞이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를 출발하였다. 하지만 도중에 풍랑을 맞아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다. 이후 재정비를 마치고, 충청도 강경포구를 목적지로 길을 떠난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 현석문 가롤로, 성 최형 베드로 등 일행 14명은 1845년 10월 12일 저녁 8시경 강경 포구 인근에 상륙하였다. 서양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조선 상복으로 갈아입고 방갓을 쓰고 포선으로 얼굴을 가린 다음, 사공 2명에게 각각 업혀 육지에 발을 내려놓았다. 공세리 성지 성당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 시대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과 3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을 사목하면서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이 된 현재의 성당 건물도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여 1922년도에 완공하였다. 공주중동 성당 현 공주 중동 본당의 전신인 공주 본당은 1897년 5월 8일 합덕 성당과 공세리 성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공주읍내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근거지가 전혀 없었고, 신자수도 20명 내외에 불과했다. 그래서 초대 주임 기낭 신부는 임시로 요골 공소에 거처하면서 관찰사가 주재하는 공주읍내 국고개 언덕 위에 현재의 부지를 매입하여 1897년 6월 28일 이전했다. 기낭 신부는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리를 전파하여 공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 성당인 공주 본당의 초석을 놓았다. 금사리 성당 부여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1801년 신유박해를 전후해서 이미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끝나고 인근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공동체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박해 후 이 지역을 처음 방문한 두세 신부와 현 합덕 성당의 퀴틀리에 신부가 여러 곳에 공소를 설립했다. 1897년 공주 본당이 신설되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는데, 공주로부터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공소나 신자수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기에 본당 신설이 요청되었다. 남방제 남방제 성지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 자리이다. ‘남방제’라는 말은 제방 둑이 ‘ㄱ’자로 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에는 200여 년이 넘는 버드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아주 오래전에 형성된 듯하다. 남방제 성지는 그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 아니라, 이곳에 살았던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낸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가운데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은 한 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신앙인이 태어나고 양육되어 영광된 순교의 관까지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에서 순교하지 않았지만, 병인박해(1866년) 당시 순교한 성 조화서 베드로는 이곳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아들 성 조윤호 요셉을 키웠다. 또한 교우촌 안에서 함께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대흥봉수산 순교성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는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나누던 ‘의좋은 순교자’,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 형제를 현양하는 대흥봉수산 순교성지가 있다. 도앙골성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1850년 1월 (혹은 1849년 말) 귀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다음 곧바로 전라도를 시작하여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1850년 10월 1일 최양업 신부는 9개월 동안 자신의 사목활동을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고했는데 이 편지의 발신지를 ‘도앙골’이라 명하고 있다. 이 편지에 신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저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포들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들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들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