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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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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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감영 강원 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했다. 그래서 원주 일대의 죄인들이 강원 감영으로 끌려와 정청인 선화당에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국사범 등의 중죄인은 물론 잡범들에 대한 형도 집행됐는데 박해가 일자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잡혀와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처형되었다. 대안리 공소 대안리 공소는 1910년 11월 12일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축성된 목조 가구식 한옥 형태의 성당 건물로 2004년 12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대안리 공소는 1892년에 설립되었고, 현 공소 건물은 1900-1906년 사이에 완공되다. 원주교구에서 1892년 이전에 설립된 본당은 풍수원 본당밖에 없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공소이다. 이렇듯 일찍이 공소가 설립된 이유는 대안리 일대가 교우촌이었기 때문이다. 묘재(성 남종삼 요힌, 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 유택지) 묘재 순교사적지에는 순교자 남상교 아우구스티노가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관직을 내놓고 내려와 은거 생활을 하던 유택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아들 남종삼 요한이 찾아오면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남종삼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치명을 각오하고 한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어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했다. 그 후 부친 남상교도 붙잡혀 공주로, 장자 명희는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하고 처 이조이, 막내아들 규희와 두 딸은 경상도로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남종삼의 부인 이조이도 창녕에서 순교하여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했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배론 성지 배론 성지는 박해를 피해 산과 계곡으로 숨어든 교우들이 모여 이룬 교우촌으로 주로 옹기 굽는 일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곳이다. 앞길이 창창했던 황사영은 천주교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되어 세례를 받은 후에는 벼슬길도 마다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배론으로 들어왔다. 그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 썼는데, 그것이 황사영 백서이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혀 황사영도 대역무도의 죄인으로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옹기 토굴 옆에는 1855년 장주기 회장의 초가집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복원되어 있고, 그 뒷산에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다. 이렇듯 배론 성지는 교회사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으로, 2001년 3월 2일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성지 일대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성내동 성당 성내동 성당은 1946년 강릉(현 임당동) 본당의 삼척 공소로 시작해 1949년 10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매긴 신부는 1950년 7월 북한군에게 피살되어 순교했고, 이듬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버크 신부가 본당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코너스 신부는 현 성당 부지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해 1957년 11월 본당을 이전했다. 1961년 11월 본당 구내에 ‘성 요셉 의원’을 개원했고, 1965년 3월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분리되면서 원주교구 소속이 되었다. 1966년 10월 본당 이름을 삼척에서 성내리로, 1988년 10월 성내동으로 변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