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신앙고백비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 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고백비’가 서 있다. 이 마을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복운의 아들 4형제가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차남인 김삼록 도미니코는 병인박해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난 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를 단단한 바위 위에 직접 새겼다.
이 신앙고백비가 교회의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김삼록은 신앙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여러 나무를 심어 눈에 잘 띄지 않게 했다. 1945년 해방 후 그의 손자인 김순경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신앙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다. 1982년 당시 서문동 본당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졌고, 1984년 서울대교구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졌다. 상주 신앙고백비는 2009년 12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2호로 지정되었다.
여우목
여우목은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예로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이다.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충청도 홍주 출신의 이윤일 가정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도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했다.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 서인순 시몬,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고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다시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왕피리
이곳은 영양군 수비면과 경계지역이며 갈전 마을은 통고산 동쪽 기슭의 깊은 산골 마을이다. 1994년 울진군 서면의 왕피리 일부(갈전)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울진 왕피리 교우촌으로 추정하는 갈전 마을은 신암리에 속하게 되었고, 교우촌 터로 추정되는 곳은 왕피천 유역 생태 · 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런 깊은 심산궁곡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문헌상으로 충청도 서산 지방의 중인 출신으로 전라도 고산을 거쳐 1801년 신유박해 때 진보 머루산으로 피난 온 김강이 시몬 형제 가정이 농사를 지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그가 입교시킨 새 신자 몇 사람과 함께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울진으로 이주해 따로 교우촌을 이루어 삶으로써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왕피리 지역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1815년 경상도에서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강이는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체포되어 안동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를 받으면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켰다. 김강이는 아우와 함께 강원도 원주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임금으로부터 사형 집행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인 1815년 12월 형벌로 인한 상처와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다. 한편 아우 김창귀는 원주에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가게 되었다. 김강이 시몬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우곡(홍유한 묘)
경상북도 봉화군 문수산 중턱의 우곡리 골짜기 안에는 한국 교회 창립 이전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스스로 그 가르침을 고요한 가운데 실천한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신동이라는 평판을 얻었던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다. 1750년경부터 이익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함께 “천주실의”와 “칠극” 등 서학을 연구하면서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함이 천주학의 가르침 안에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했다.
홍유한은 깨달은 바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1757년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여 18년간 “칠극”에 따른 천주교의 수계생활에 정진했다. 1775년 그는 더 깊은 믿음을 위해 경상북도 소백산 밑의 단산면 구구리로 들어갔다. 축일표도 기도서도 없었지만 매월 7일째 되는 날을 주일로 정해 세속의 모든 일을 접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으며,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는 정확한 날을 모르는 대신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낸 그는 1785년 세상을 떠나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은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학문 연구를 통해 얻은 진리를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한 경건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뜻을 이어받아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후손들이 13명이나 된다.
이에 후손들은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했으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다가 안동교구와 협의하여 선조인 홍유한 선생의 묘가 있는 우곡 성지에 13위 순교자들을 모시게 되었다. 2009년 5월 안동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13위 순교자들의 순교 터에서 흙을 담아와 가묘를 조성하고 ‘홍유한 후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다. 이로써 우곡리의 골짜기는 홍유한 선생과 그 후손 순교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후배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주는 거룩한 땅이 되었다.
우련전
이곳 우련전은 영양군과 봉화군 경계의 일월산 산중에 있는 심산유곡의 마을로 현재는 폐교된 갈산 초등학교 분교 건물이 있다. 한편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귀양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곳에 1798년경 충청도 솔뫼에 살던 김종한 안드레아와 몇몇 신자 가정들이 피난 와서 살기 시작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작은 할아버지인 김종한은 1815년 안동 포졸들에게 잡혀 영장 앞으로 끌려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투옥되었다가 감사의 명령으로 다리에 매질을 당한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모범된 신앙생활을 하며 다른 신자들의 돌보던 중 1816년 12월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고,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와 함께 우련전에서 붙잡힌 건사골의 예비신자 이윤집도 배교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굶주림과 쇠약으로 인해 감옥에서 사망했다. 신자들이 잡혀간 후 이곳 우련전의 교우촌은 없어지게 되었다. 남은 가족들과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아마 김종한의 가족들은 칠곡의 신나무골에 얼마간 살다가 고향인 충청도로 간 것으로 추정한다.
진안리
이곳이 영남의 관문이기에 서울로 과거나 일을 보러가는 이들은 물론, 최양업 신부와 칼레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전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이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1836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1849년 4월 15일 상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다. 귀국 후 그는 5개 도(道)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했다.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은 그의 활동은 12년 간 계속되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울주군의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했으나 무사히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 방문을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했다.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선종 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교우촌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초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한실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에 위치한 한실 교우촌은 백화산 서북부 중턱에 위치해 있고, 그 뒷산을 넘으면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 성지와 연결된다. 천혜의 피난처로 박해 때 신자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상주 배모기에 살던 서유도 가족들이 한실 잣골로 피난을 오면서부터 한실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실은 경상북도의 사도인 칼레 신부가 1866년 병인박해 무렵 백화산을 넘어 문경과 연풍 등을 다니며 전교할 때 사목의 중심지였다. 칼레 신부는 이곳을 중심으로 인근의 건학, 여우목, 사실 교우촌과 백화산 너머 연풍 등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전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본격화되면서 칼레 신부는 한실을 중심으로 문경과 백화산을 넘어 연풍 등지로 쫓겨 다니면서 모진 고생을 해야 했다. 한실 교우촌의 교우들 또한 포졸들에게 잡혀 상주 진영 옥에서 15명이나 순교했다. 한실 교우촌의 김예기 · 김인기 회장 형제는 신자들의 괴수라 하여 여우목 공소에서 체포되어 온 성 이윤일 요한 회장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후 한실 교우촌은 쇠퇴해갔다.
안동교구는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순교자 현양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9월 상주시 함창읍 나한리의 한 논두렁에서 순교자 서유형 바오로의 묘소를 발굴해 유해와 묘소 흙 등을 옹관에 담아 한실에 새로 조성한 무덤에 안치했다. 그리고 함께 순교한 형수 박 루치아의 가묘도 조성했다. 서유형은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였던 서광수의 친척으로 문경시 산양면 평지리 일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5년 10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서유형과 박 루치아는 1866년 겨울 상주 옥에서 순교했다.
홍유한 유택지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1784년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수덕생활을 한 선각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농은 홍유한이다.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그가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은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힌다.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천주학을 처음 접한 뒤 유교와 불교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리를 발견한 그는 이곳 구구리에서 1775년부터 10년간 학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하며 살았다.
서학을 연구하던 중 진리를 발견한 홍유한은 1757년 서울을 떠나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18년간 홀로 신앙을 연마했다. 그러던 중 1775년 더욱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 아래 있는 순흥 고을 구고리(현 구구리)로 옮겨 가서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냈다. 선종 후 그의 시신은 문수산 자락에 있는 우곡리에 안장되었다.
홍유한의 유택지에는 경종 4년(1724년) 그의 조부인 홍중명이 하사받은 효자문 현판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안동교구는 홍유한 선생의 신앙을 기리기 위해 1995년 5월 27일 교구 설정 25주년과 홍유한 선생 선종 210주년을 맞아 효자문 안마당에 유적비를 건립했다. 유적비 앞면에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수덕자 풍산 홍공 유한 선생 유적지’라 기록하고, 옆과 뒷면에는 그의 생애를 상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