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사골
![](/data/ckfinder/images/%EA%B1%B4%EC%82%AC%EA%B3%A8_%EA%B5%90%EC%9A%B0%EC%B4%8C%ED%84%B0_SH109815.jpg)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 있는 건사골(개내골) 교우촌은 우련전 교우촌에서 동북쪽으로 깊은 계곡을 따라 1.5km 쯤 가다가 왼쪽으로 개내골길을 따라 올라가면 일월산 줄기인 장군봉 밑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1815년 을해박해 당시 예비신자였던 이윤집이 살고 있었다. 이윤집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박해 당시 예비신자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봉화 지방 사람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한 후에 세례성사는 받지 못했지만 예비신자로서 독실히 천주교를 믿었다.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안동 포졸들에 의해 음력 4월 23일 우련전에 살던 김종한 안드레아가 체포된 후, 그 부근에 있는 건사골의 이윤집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붙잡혀 가서도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김종한과 같이 안동 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 후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을 기다리던 중 굶주림과 건강의 쇠약함으로 인해 감옥에서 옥사했다.
건학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형상의 교우촌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점터는 원래 예천군 동로면 지역으로 1895년 문경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문경시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재원군 덕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사방이 높고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중에 있다. 건학(乾鶴)이란 마을 이름도 마을 주위에 있는 산의 형상이 마치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깊은 산중이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전후로 추정된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1827년 정해박해 때 이웃 고을인 충청도 단양의 가마기에 살던 복자 박경화 바오로 가정이 건학의 이웃 마을인 상주 멍에목(현 동로면 명전리)으로 이주하여 왔다. 그러나 그해 4월 그의 가족들은 상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상주 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노령의 박경화는 옥사하고 아들인 복자 박사의 안드레아는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5월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 1월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여우목 교우촌에 살던 성 이윤일 요한 회장의 아들인 이 시몬이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이송된 후 옥중에서 교살되어 순교했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이 마을에 살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을 떠났고, 박해가 끝난 후에는 외교인들이 들어와서 살았다. 박경화 바오로와 박사의 안드레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곧은정
곧은정 교우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당시 곧은정 교우촌에는 충청도 여사울 사람으로 중인 계급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복자 김희성 프란치스코가 피난 와서 살았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인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가 순교한 후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거룩한 신앙심으로 모든 재산을 버려두고 가족과 함께 이곳 일월산 깊은 산골에 있는 곧은정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그는 나무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사순시기에는 엄격하게 금식을 지켰고, 교회 서적을 읽으며 기도로써 굳건한 신앙을 키워갔다. 1815년 3월 을해박해 때 안동 진영의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자 아들에게 가족을 부탁하고, 아내에게는 신앙을 지켜 자녀들을 잘 가르친 뒤 장차 자기 뒤를 따르도록 권고한 후 순순히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대구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준 그는 1816년 12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김광옥 안드레아와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곰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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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직이 교우촌이 있었던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는 영주 부석사의 주산인 봉황산 밑에 있다. 곰직이골은 오전 마을 동북쪽에 있으며 봉화읍에서 물야면사무소를 지나 오전 약수터로 가는 길목 1㎞ 못 미쳐 왼쪽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가야 나온다. 이곳은 옛날에 곰이 새끼를 쳤다고 하여 곰직이골(곰집)이라 했다. 이곳에 처음으로 신자들이 살았던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이다.
그 후 이곳은 신자들의 피난처가 된 듯하며, 정해박해(1827년) 이전에 충청도 홍주 고을 출신인 복자 이재행 안드레아가 곰직이 교우촌으로 이주해 왔다. 그는 고향에서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산골에 은거해 살며 오랫동안 피난을 다니다가 마침내 곰직이 교우촌에 안착한 것이다. 그는 정해박해 때 체포되어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대구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다시금 배교를 강요당하며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후 12년 동안 옥에 갇혔다가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5월 관덕정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 외에도 황해도 사람으로 경기도 양지 마을에 살았던 이성욱과 이성천 형제는 1839년 기해박해를 만나 봉화로 피난 왔다가 다시 충청도 배론에 가서 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 무렵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우곡으로 가는 길목이자 불영 계곡으로 가는 큰 도로가 있는 봉화군 북면 등지에 신자들이 살고 있었는데, 병인박해 중인 1867년 이 요셉과 김세문이 체포되어 충주에서 순교하는 등 곰직이를 중심으로 한 봉화 지방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 때 체포되어 다른 곳에서 순교했다.
노래산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 속한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의 노래산에는 1801년 신유박해 후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기 시작했다. 당시 신자들은 산꼭대기의 분화구처럼 생긴 이곳에서 넓은 산지를 개간해 화전을 일구며 외교인들과는 일체 접촉을 하지 않고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자들은 15년 동안 거의 흉년을 모르고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했는데, 1814년 전국적인 대흉년과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경상도 지방은 수해까지 겹쳐 더욱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때 노래산 교우촌을 드나들며 장사와 구걸을 일삼던 전지수란 사람이 빈궁으로 인해 신자들로부터 받는 애긍이 줄어들자 신자들을 밀고하여 얼마 안 되는 재물마저 빼앗으려 했다. 전지수의 안내로 1815년 교우들이 함께 모여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있을 때 경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모든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렇게 체포된 신자들은 경주 진영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으로 인해 배교하기도 하고,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고문과 굶주림으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기도 전에 옥사하기도 했다. 결국 대구 감영까지 이송된 신자들 중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여 사형언도를 받고 집행 때까지 남은 신자는 노래산의 고성대 · 고성운 · 김화춘 · 구성열과 머루산의 이시임, 곧은정의 김희성, 우련전의 김종한 등 모두 7명이었다.
이들은 대구 감영에서 17개월 가까이 옥살이를 하다가 1816년 12월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들과 교우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으나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노래산 교우촌은 없어지고 신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오늘날 노래산 교우촌 터 주변에는 2007년 3월 청송 양수발전소가 준공되고, 발전을 위한 청송호의 상부댐이 노래산 정상 밑에 건설되어 교우촌 자리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들 7명의 순교자들은 모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마원(박상근 마티아 묘)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우정을 기리며
영남의 관문인 새재 아래 위치한 문경시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인근 교우촌처럼 화전을 일구며 살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새재를 넘어 마원까지 미쳤고, 이때 마을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
현재 마원에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남아 있다. 칼래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좁쌀을 사기 위해 한실 교우촌에 갔다가 그곳에 숨어 있던 칼래 신부를 더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을 제공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에게 발각되어 3일 만에 새벽을 틈타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 했는데,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자 칼래 신부는 박 마티아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칼래 신부의 명에 순명하여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박 마티아는 그 해 12월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고, 옥에 갇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또한 문경 인근에서 잡혀온 교우들을 권면하며 순교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결국 그는 1867년 1월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 고향에 안장했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머루산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는 예로부터 머루가 많이 나서 구머리 또는 포산(葡山)이라 했는데, 이곳 역시 노래산 교우촌과 같이 태백산맥 줄기인 포도산 꼭대기에 있는 심산유곡의 마을로 1801년 신유박해 후 충청도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다. 신자들은 산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다래와 머루를 따먹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15년 청송 노래산 교우촌의 신자들이 체포된 지 며칠 후에 포졸들이 진보 머루산까지 덮쳐서 모든 신자들을 붙잡아 안동 진영으로 끌고 갔다. “일성록”에 의하면 이때 체포된 신자들 중 박사행 등 20명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지만 김시우 알렉시오 등 13명은 용감히 신앙을 증거했다고 한다.
복자 김시우 알렉시오는 충청도 청양 출신으로 반신불수인 탓에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천주교에 입문했다. 고향을 떠나 머루산에 살던 중 포졸들이 왔을 때 체포되어 안동에서 대구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은 후 1816년 음력 10월 21일 이전에 옥사했다. 충청도 덕산 출신으로 머루산에서 살던 복자 이시임 안나도 이때 체포되어 안동에서 대구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과 굶주림을 이기고 사형선고를 받아 1816년 12월 19일 관덕정에서 순교했다. 1815년의 을해박해로 인해 머루산 교우촌은 완전히 없어졌고, 남은 신자들 또한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김시우 알렉시오와 이시임 안나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배모기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양범리(良凡里)는 그 지형이 뱀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양배미기’라 불리다가 변하여 ‘양범리’가 되었는데, 이 마을이 바로 배모기 교우촌 터이다.
이곳 배모기에는 1785년 명례방 신앙집회 중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에 연루되어 문중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당해 낙향한 서광수와 그의 넷째 아들인 서유도 가정에 의해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서광수의 셋째 아들인 서유오 가정과 넷째 아들인 서유도 가정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그들의 후손 중에서 순교자가 여러 명 탄생했다.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 가정인 서광수의 후손들은 대구 지방의 명문인 달성 서씨 집안으로 초기 경상도 지방의 복음 전파에 크게 공헌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서유도 가정은 문경 한실로 이사했다. 서유도 가정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된 경주 이씨 이응동의 선대 가정이 이 지방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했고, 순교 복자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가정은 인근의 은재에서 살다가 청송 노래산으로 피난을 갔다. 역대 박해 때마다 상주 지방에 살던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상주 시내에는 목사의 아문이 있었기 때문에 문경, 상주 등지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들이 관아에서 영장에게 문초를 받다가 사망하거나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형장에서 참수를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