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분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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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옥 양식에 서양의 바실리카식 평면을 결합한 성당 수분리가 속한 장수 지역에 언제부터 교우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850년대 최양업 신부가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시기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지역 중의 하나였으며, 이춘경이라는 교우가 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이곳에서 살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병인박해 이후에는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피난 온 신자들에 의해 인근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수분리에 공소가 지어진 것은 1913-1915년쯤으로 당시 수분리를 관할하던 함양 본당과 진안 어은동 본당의 인접지인 무주 · 남원 · 임실 등지의 선교를 위하여 중간 지점인 수분리에 사제가 쉬어갈 강당과 침실을 건립했는데, 이는 이후 본당 설립의 기틀이 되었다. 하지만 관리가 부실해서 허물어질 위험에 처하자 1921년 공소 건물을 전면 개축하는 공사를 시작해 전통 한옥 양식의 공소와 사제관을 마련했고, 1926년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그 후 본당이 장수읍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수분리로 돌아오기도 하고 6ㆍ25 전쟁으로 신부가 부임하지 못해 남원 본당의 관할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본당 설립을 염원한 장수 지역 신자들은 1952년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해 기금을 마련했고, 이듬해 현 장계 본당 소재지에 부지를 마련해 1954년 장수군 전체를 관할하는 장계 본당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수분리 본당은 장계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1977년 장수 공소가 본당으로 설정된 후 수분 공소는 장수 본당 관할로 변경되었다. 2005년 6월 18일 수분 공소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부터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심하게 훼손된 공소 경당을 옛 모습대로 보수하여 2013년 4월 축복식을 가졌다.
어은동 공소
1900년 진안 지역 첫 본당으로 설립되었던 유서 깊은 공소 1876년경 진안 일대에는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충청도 등지에서 피난 내려온 신자들이 여러 곳에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1888년 어은동 공소가 설립된 후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신자들은 점차 어은동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지속했다. 진안 지역은 신자들의 성실한 신앙생활로 인해 당시 전주(현 전동) 본당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가 관할하던 지역 가운데 신자수와 영세자수가 최고였다. 그래서 1900년 9월 뮈텔 주교는 진안 등의 지역을 전주 본당에서 분리해 보두네 신부의 뜻에 따라 어은동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김양홍 신부를 파견했다.
1901년 9월 김양홍 신부는 옛 공소집을 수리 · 확장하여 너와 지붕 목재 7칸 건물의 성당으로 완공했다. 1903년 신자수가 1,400명에 이르자 이듬해 마을 아래쪽에 15칸의 새 성당을 신축했고, 그 후로도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자 1909년 3월 너와 지붕 목조 49평의 새 성당을 준공하여 9월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했다.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건물이 바로 이 공소 건물이다.
2대 주임 이상화 신부는 1922년 6월 본당의 발전을 위해 전교 전망이 큰 마령면 연장리의 한들 공소로 본당을 옮겼다. 어은동 본당이 한들 공소에 본당 자리를 넘겨주고 공소로 편입된 가장 큰 이유는 산속 깊은 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1941년 4월 진안읍에 본당이 신설되자 한들 본당의 이기수 신부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42년 진안읍의 본당이 폐쇄되어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다.
한편 어은동 공소도 1947년 11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어 송남호 신부가 부임하여 진안면과 장수군 천천면 일대를 관할하며 전교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6 · 25 전쟁으로 어은동 본당은 1951년 2월 폐쇄되고 한들 본당 공소로 환원되었다. 1952년 한들 본당의 김반석 신부는 진안읍으로 다시 본당을 이전한 후 1956년 10월 110평의 성당을 준공하여 이듬해 7월 봉헌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어은동 · 진안읍 · 군상리 · 한들로 본당을 옮기고 그 사이에 진안읍과 어은동에 새로 본당이 신설되기도 했던 진안 지역의 본당은 비로소 ‘진안 본당’으로 정착되었고, 어은동 공소는 진안 본당 관할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산 동헌(백지사터)
여산 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 당시 고산, 금산, 진산 등의 심산유곡에 숨어 살다 이곳 여산 관아로 잡혀 온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형벌과 굶주림의 고통을 당한 순교지이다. 1866년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고,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치명일기” 등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5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백지사형이란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사시키는 처형 방법이었다. 끼며 기도할 수 있다.
조선 말기의 건조물로 추정되는 여산 동헌은 1980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고, 맞은편 여산 초등학교 내에 있던 감옥은 흔적도 없다. 여산 동헌과 여산 숲정이 사이에 위치한 여산 성당은 동헌 바로 아래 부지를 매입하여 백지사터 성지를 조성했다. 백지사터 성지에는 순교성지 기념비와 십자가의 길, 백지사형 당하는 얼굴 조각 등이 있어 박해 당시의 처절함을 느끼며 기도할 수 있다.
여산 숲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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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숲정이는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순교자들을 배출한 대표적인 순교 성지이다. 이곳은 병인박해 중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순교자들의 무덤은 천호 성지에 모셔져 있다. 기록된 순교자만 25명에 이르는 여산 곳곳에서는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교우 중 17명이 고산 ‘넓은 바위’ 교우촌 사람들로, 김성첨 일가 여섯 명이 대표적이다.
여산 본당은 지금은 숲이 아닌 논과 밭으로 변한 숲정이 부근 전답을 1980년에 매입해 성지를 조성했다. 야외제대와 광장을 마련하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숲정이의 옛 모습을 재현하고자 했다. 2007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여산 숲정이는 익산시의 지원으로 숲정이 일대 약 1만 평에 탐방로와 주차장, 분수대, 야외 성지 체험장, 피정의 집 등을 마련하는 공원화 사업을 순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09년 말 야외제대 및 중앙 광장 등을 새롭게 단장했고, 2014년 성지 입구 주차장과 화장실, 십자가의 길 14처 등을 마련해 순례자들을 돕고 있다.
전동 성당
전동 성당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참수형을 받은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다. 이런 이유로 전동 성당 터는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라고 불린다. 또한 ‘호남의 사도’로 불린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김유산 토마스,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과 이우집,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전동 성당 초대 주임인 파리 외방전교회 보두네 신부는 20세기 초 전동 성당을 지을 때 일제 통감부가 전주에 신작로를 닦으며 풍남문 성벽을 헐자 이 성벽 돌과 흙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이를 가져다가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 유항검을 비롯한 전동 성당 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목을 효수했던 성벽의 돌을 성당 주춧돌로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순교지일 뿐 아니라 ‘신앙의 요람’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1981년 사적 제288호로 지정된 전동 성당은 2006년부터 대대적인 보수사업을 시행했고 이어서 전동 성당 사적공원화 사업을 추진하여 2011년 12월 사제관 뒤편에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계속해서 전북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된 사제관을 보수해 유물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주변 부대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사적공원화 사업이 완료되면 전동 성당은 인근의 풍남문(보물 제308호)과 경기전(사적 제339호)을 비롯해 한옥마을, 오목대와 한벽루, 치명자산 성지까지 연계되는 성지순례와 역사문화 체험의 중심축을 이루게 된다.
전주 숲정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머리’로도 불린 전주 숲정이는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다. 1802년 1월 31일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자부 이순이, 조카 유중성 등 유항검의 가족이 처음 참수되면서부터 순교자의 피가 마르지 않아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하였다. 그중 신유박해 순교자 이순이와 유중성, 기해박해 순교자 김대권, 이태권, 이일언, 정태봉, 신태보가 2014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병인박해 순교자 정문호, 손선지, 한재권, 조화서, 이명서, 정원지는 1984년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
유함검의 가족 순교자 중에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가 있다. 이 루갈다는 성모 마리아를 닮아 평생 동정을 결심했고, 이를 안 주문모 신부가 호남 전교 길에 유항검의 장남 중철 또한 동정으로 살려는 원의를 확인하고 혼사를 주선하여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와 같은 동정부부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4년 동안 굳은 의지로 정결한 생활을 해 온 동정부부는 신유박해를 만나 순교의 영광을 입게 되었다.
숲정이 성지는 1930년대 초 이명서 성인의 손자가 순교터를 매입하면서부터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어 1935년 십자가 순교비가 서고 1968년 순교복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1984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으나 도시화의 물결로 1992년 해성 중고등학교가 이전하고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래의 순교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성지를 조성하여 순교터에서 옮겨 온 토사를 그 위에 덮고 십자가와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다. 2004년 6월에는 성모자상과 14처를 마련해 축복식을 가졌다.
천호성지
천호(天呼)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 형성된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병인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불어 닥치던 1866년 12월 13일(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이명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한재권 요셉과 같은 해 8월 28일(음)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 밖에도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천호산에 종적을 감춘 채 묻혀 있다.
전주교구는 시성식이 끝난 1984년 10월부터 천호 성지 개발에 본격 착수하여 1985년 11월 30일 새롭게 단장한 순교자 묘역을 축성하였다. 성모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1987년 피정의 집을 완공했다. 2007년 5월 천호 부활성당을 새로 건립했고, 2008년 5월에는 낡고 오래된 천호 공소 경당(현 천호 성당)을 새로 건립했다. 또한 다양한 도보 순례길을 개발하면서 2009년에 전북 지역 4대 종교 성지를 걷는 ‘아름다운 순례길’도 함께 마련했다. 2013년 12월에는 한국교회 최초로 ‘천호 가톨릭 성물박물관’을 개관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초남이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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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 성지는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신희, 동정부부로 유명한 유항검의 맏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과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 마태오 등 유항검 일가가 살았던 생가터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유항검 일가가 모두 순교하자 유항검의 생가는 ‘파가저택’(破家瀦宅)형을 받아 저수지로 변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들 순교자 중에서 유항검과 그의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터인 ‘파가저택’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주교구는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 교리당터, 가매장터를 확인하여 성역화 작업을 진행했다. 1987년 성지 축복에 이어 2000년 생가터를 새단장하고, 2002년 한옥 형태의 교리당과 ‘정지샴’(샘물)을 복원했으며, 2005년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을 일자형 한옥 형태로 건립했다. 2006년에는 파가저택지 옆에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여 현재 성체조배실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시복식을 준비하면서 생가터에 경당을 마련하고, 교리당터 입구 조경공사 등을 통해 한층 아름다운 성지로 변모했다.
초록바위
초록바위는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순교자 홍봉주의 아들이 수장된 순교터로 곤지산 끝자락 전주천으로 이어지는 절벽 부분인데, 현재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축대를 쌓아놓아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온 가족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아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이를 채워 1867년 가을 전주천에 밀어 넣어 죽였다. 전주교구에서는 두 소년 순교자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자 2006년 5월 싸전다리 부근 전주천변 도로 옆에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치명자산
치명자산은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등 일가 7명의 신유박해 순교자가 묻혀 있는 곳이다. 원래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리던 이곳에 1914년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또는 루갈다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 순교자 중에서 유항검, 유문석, 유중성, 유중철, 이순이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조정에서는 유항검 일가의 흔적을 없앨 요량으로 처형과 함께 파가저택(破家瀦宅)형을 내렸다.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히 시신을 수습해 고향인 초남 땅에 묻지 못하고 김제군 재남리에 가매장했다. 1914년 전동 성당의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그들의 유해를 치명자산 정상으로 옮겨 모셨고,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아래 유항검 일가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성당을 지어 1994년 봉헌했다. 치명자산은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 공원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몽마르뜨(순교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