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배티 성지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로 박해 시대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했다. 성지에는 1997년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과 오솔길을 따라 각각의 맷돌에 새겨진 14처, 그리고 2002년 봉헌된 ‘양업 영성관’(피정의 집)이 마련되어 있다.
성지에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조금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사제관 겸 성당이 있다. 1년 내내 도보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하던 최양업 신부가 장마철에는 이곳에 머물며 “천주가사”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를 번역했다. 1999년 최양업 신부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의 농가를 헐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 집은 이미 1849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음해 다블뤼 신부가 설립한 조선교구의 소신학교로 사용됐던 곳이다.
배티 고개 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14인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있다. 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 그 가운데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8명을 포함해 모두 34명에 이른다.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무명 순교자 묘소들로 산재해 있다. 청주교구는 배티 성지의 성역화와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으며, 2012년 4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봉헌식, 2014년 4월 11일 최양업 신부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다. 최양업 신부 박물관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감곡 성당(매괴 성모 순례지)
유서 깊은 충청북도의 모본당이자 성모 순례지 감곡 본당은 1896년 ‘장호원 본당’이란 명칭으로 설립되었다. 장호원 지역은 본래 부엉골 본당 관할로 1894년 부임한 부이용(Camillus Bouillon) 신부는 본당 위치가 적당치 않아 1896년 장호원의 매산(玫山) 언덕에 있는 한옥을 매입하였다. 이 집은 본래 임오군란 때 민비(閔妃)가 일시 피신하기도 했던 민응식(閔應植)의 한옥으로 1895년 말 의병과 일본군의 전쟁으로 불타 버린 상태였다. 부이용 신부는 1896년 9월 17일 장호원으로의 본당 이전을 결행하였고, 부엉골 본당은 폐지되었다.
신자수의 증가와 함께 부이용 신부는 1904년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 성당을 완공하였고, 교육 사업에도 눈을 돌려 1907년 매괴학당, 1912년 여학교를 설립하여 현 매괴고등학교의 기초를 놓았다. 1914년부터 매산에서 성체거동을 시작하여 매년 거행하고 있고, 1930년 10월 7일 현재의 고딕식 연와조 성당을 신축하였다. 일제 말 적국인 프랑스 선교사라는 이유로 용산 신학교에 연금되어 본당을 떠나야 했지만, 해방과 함께 다시 감곡 성당으로 부임해서 활동하다가 1947년 10월 선종하였다. 그 후 감곡 본당은 충청북도의 모본당으로서 많은 자본당을 분가했다.
1930년 충청북도에 최초로 건립된 감곡 성당은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제대 정면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7발의 총탄을 맞았다는 본당 주보(主保)인 ‘매괴 성모상’이 설치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된 2층 건물인 사제관은 성당이 건립된 4년 후인 1934년에 완공되었고, 2002년 유물관(현 매괴 박물관)으로 변경되었다. 2005년에는 ‘가밀로 영성의 집’을 신축하여 피정의 집으로 운영하고 있고, 2008년 9월 매산 정상에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 사도 요한상, 임 가밀로 신부 성체강복상 등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청주교구는 2006년 10월 7일 감곡 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했는데, 성모 순례지 지정은 1991년 10월 7일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에 이어 한국 교회에서 두 번째이다.
멍에목
복자와 순교자들의 고향이자 최양업 신부의 사목 순방지
보은 멍에목은 복자 박경화 · 박사의 부자가 거주하던 교우촌이요, 최 양업 신부가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한 공소였다. 그뿐만 아니라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 복자 김종륜, 순교자 최용운 회장과 안 루카, 여 요한 등이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던 천주교 성지다.
멍에목 성지에는 신앙 선조들의 믿음살이와 참 신앙이 짙게 배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의 손길 아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신앙으로 인해 박해자들의 형벌 아래 죽어야만 하였다. 오늘의 후손들이 은총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신 분들이다.
성지 조성 청주교구는 2016년 8월 12일 멍에목 교우촌의 교회사적 의미를 반영하여 성지로 지정하고 담당 신부를 임명했다. 현재 멍에목 성지는 숨어 있던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백곡성당
아담한 성당 마당에 모셔진 두 순교자의 묘
백곡 성당이 자리한 지역은 예로부터 깊숙한 산골로 박해 시대 교통의 요지로서 수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박해 시대를 거쳐 신앙을 자유를 얻은 뒤 여러 번의 이전을 거쳐 현 위치에 자리한 후 1961년 공소 경당을 세웠다. 이곳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남원 윤씨와 밀양 박씨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시누이와 올케 사이이다. 홍주에서 살다 박해를 피해 배티로 이주해 온 윤행윤의 손자며느리인 박 바르바라와 손녀 윤 바르바라는 함께 체포되어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매를 맞아 순교했고, 그 시신은 가족들에게 거두어져 배티 성재골에 안장되었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순교일은 1866년 10월 20일이다.
배티 뒷산 성재골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되어 있던 이들의 묘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1970년대 초 후손들이 다시 찾았다. 1977년 평택에 사는 순교자의 후손들이 묘를 선산으로 이장하기 위해 배티를 찾았을 때 배티와 백곡 공소의 신자들은 후손들을 만나 교회에서 대대로 잘 돌보며 기도드릴 수 있도록 설득하여 두 순교자의 유해를 백곡 공소 경내로 이장한 뒤 깨끗하게 단장했다. 2018년 노후화된 기존 공소 건물을 헐고 새 성당과 교육관을 건립해 봉헌식을 올렸고, 2019년 8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2019년 12월에는 본당 주보인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유해를 분배받아 모셨다.
연풍
연풍은 성 황석두 루카의 고향이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교우촌이다. 박해를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혜의 도주로를 이용해 관문 성벽 밑의 수구문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했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을 전한 최양업 신부이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시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선종한 최양업 신부는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안장되었다.
두 번째로 황석두 성인은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젊은 나이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와 가족들의 모진 반대를 극복하고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위앵과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 등과 함께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63년 공소로 쓸 옛 향청 건물을 매입하면서부터이다. 3백년이나 된 이 건물을 매입할 때만 해도 순교 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매입 후 논과 집 터를 정리하던 중 형구돌이 발견되었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임이 드러나자 성지 개발이 가시화되어 1979년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문중 산에 묻힌 성인의 유해를 1982년 연풍 성지로 천묘했다. 이어서 다섯 성인상과 반석, 대형 십자가와 경당, 향청 건물 복원 및 야외제대와 성모상 등을 마련해서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다. 2014년 9월에는 성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 기념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옥천 성당
감곡 본당에 이어 청주교구 내에 두 번째로 설립된 본당
옥천 지방 최초의 선교는 감곡 본당 부이용 신부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1903년 공주 본당 파스키에 신부에 의해 옥천 공소가 설립되었다. 경부선 개통 이후 옥천 지방이 교통의 요지로 주목받으면서 1906년 5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홍병철 신부는 본당의 초석을 놓았으며 1909년 옥천읍 이문동에 2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했다. 2대 주임 이종순 신부는 대전 지역 신앙 공동체의 발전 가능성을 보고 1914년 11월 비룡 본당을 설립하여 부임함으로써 옥천 본당은 그 관할 공소가 되었고, 1919년 11월 대전(현 대흥동) 본당의 설립과 함께 그 관할이 되었다.
그 후 다시 본당이 되었다가 공소가 되는 과정을 거쳐 1948년 김영근 신부의 부임으로 비로소 본당으로서 안정을 찾았다. 김영근 신부는 옥천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삼양리 신시가지에 25평 규모의 새 성당을 완공하여 본당을 이전했다. 1953년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충청북도 지역을 담당하면서 부임한 페티프렌 신부는 1956년 4월 옥천읍에서 가장 큰 건물인 100여 평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했으며, 본당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을 위한 ‘성모의원’(나환우 진료소)과 ‘천당의 문’ 양로원을 설립했다.
1955년 이후 보은, 영동, 황간 등 많은 본당을 분가한 옥천 성당은 1958년 청주대목구 설정으로 대전교구에서 청주교구로 소속이 바뀌었다. 1991년 11월 류한영 신부는 일자형의 성당 건물을 열십자형으로 증 · 개축했고, 1996년 5월 이승용 신부는 본당 설립 90주년 기념사업으로 소화 어린이 집을 완공해 축복식을 거행했다. 2002년 2월 옥천 성당은 1950년대에 지은 충북 성당 건축물로 유일할 뿐 아니라 해방 이후 다른 성당 건축의 전형이 된 가치를 인정받아 가톨릭교회 근대문화유산 중에서 처음으로 등록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