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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4-07 16:12
춘천교구
글쓴이 : (주)점프투어리즘           @          

강릉 대도호부 관아

강원도 강릉에도 어김없이 순교의 보혈이 서려 있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는 “치명일기”에 기록된 심능석 스테파노와 이유일 안토니오 정도지만, 교회사가들의 연구와 구전 등을 종합하면 강릉에서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8년에 많은 신자가 강릉 대도호부 관아로 끌려와 심문을 받고 순교했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에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은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에 관한 7가지 정사(政社)를 시행하던 곳이다. 이곳 칠사당과 그 뒤편의 임영관에서 많은 교우가 합당한 심문도 없이 모진 고문을 받고 참수되었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인근에는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 역할을 한 임당동 성당이 있다. 1955년 완공된 현 성당은 고전미와 현대미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수려한 건축물로 2010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춘천 곰실 공소

춘천 죽림동 성당의 모체가 된 춘천교구의 요람

곰실 공소는 춘천교구와 죽림동 주교좌성당의 모체가 된 곳으로 1920년 풍수원 성당에서 분가하여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곰실 본당의 설립에는 한 청년의 헌신적인 전교 활동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1872년 춘성군 동면 노루목에서 태어난 엄주언 마르티노(말딩)는 청년 시절 우연히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구도의 길을 걷기로 한 후 가족과 함께 천진암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전교의 사명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고은리의 한 폐가를 사서 정착한 후 자선과 모범적 신앙생활로 이웃들을 감화시켜 300명에 가까운 신자가 생겼다. 엄주언 회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1920년 공소를 건립하고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그해 9월 김유룡 초대 주임신부를 모시고 춘천지역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그 후 춘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1928년 현 죽림동 성당 아래 땅을 사서 죽림동 본당의 전신인 춘천 본당을 설립하였다. 본당이 춘천으로 옮겨간 후 곰실 본당은 공소로 변경되었고, 1969년 효자동 본당이 분가한 후 효자동 관할 공소가 되었다. 춘천 교구는 1998년 11월 11일 성 마르티노 축일에 죽림동 본당의 모체가 된 곰실 공소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던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을 비롯해 평신도 사도직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며 춘천지역 선교의 초석이 된 평신도들을 기리기 위해 ‘평신도 추념의 날’을 제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다. 2006년 9월에는 곰실 공소가 죽림동 주교좌본당과 춘천교구 자체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살려 효자동 본당 관할에서 죽림동 주교좌본당 관할로 옮겼다. 그리고 오랜 세월 풍상으로 낡은 곰실 공소 내부를 새롭게 단장하여 2009년 11월 11일 중창 축복식을 거행했다. 현재 곰실 공소는 거두리 본당 관할로 변경되었다.

 

금광리 공소

금광리 공소는 1887년 설립된 강릉 지역 천주교의 모태와도 같은 곳이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된 계기는 대원군에 의해 일어난 병인박해(1866년)라고 할 수 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진 시기는 19세기 말경인데,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과 현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공소 초기 원산 본당 관할이었으나 주문진 성당 공소를 거쳐 현재는 노암동 성당 관할 공소이다. 1921년 한때 금광리 공소는 양양 본당 보좌신부의 파견으로 본당이 되기도 했지만, 지역적으로 외진 이유로 1923년 주문진에 새 부지를 마련해 이전함으로써 주문진 본당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춘천 소양로 성당과 순교터

광복 무렵 죽림동 본당 관할이었던 소양로 지역의 신자수가 늘어나자 1950년 1월 소양로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콜리어 신부가 부임했다. 그러나 바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콜리어 신부는 성체를 옮겨 모시고 신자들에게 피신을 권고한 후 사태를 지켜보다가 6월 27일 죽림동 주교좌성당으로 이동하던 중 체포되어 복사 김경호 가브리엘과 함께 공산군에게 심문을 받고 이동 중에 총살당했다. 콜리어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가운데 한국 전쟁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 성당 마련이 늦어지다가 1956년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버클리 신부가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9월 3일 9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했다. 버클리 신부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해, 제대를 중심으로 회중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가도록 했다. 소양로 성당의 이러한 건축기법은 고전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적절히 혼합된 형태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제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소양로 성당은 2006년부터 문화재청과 강원도 및 춘천시의 도움을 받아 원형 보존 작업을 시행했다. 이음매가 낡은 함석지붕과 창호를 보수하고 없어졌던 성가대와 벽 제대를 복원했으며, 붉은 카펫이 깔려있던 제단을 나무 널판으로 바꾸고 목조 난관으로 그 둘레를 둥글게 감았다. 성전 외벽을 두르고 있던 전선을 모두 지하로 넣어 원형을 최대한 살려 2009년 5월 중창(重創) 축복식을 거행했다. 또한 춘천교구는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콜리어 신부의 순교혼을 기억하고자 소양로 성당을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지정했다.

 

양양성지, 성당

착한 목자 순교자 이광재 신부가 사목한 영동 지역 신앙의 모태 영동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양양 지역은 섭가지 · 풍수원 · 원산 · 안변 · 내평 본당 관할을 거쳐 1921년 5월 5일 ‘양양 본당’이 설립되었다. 1922년 양양읍 서문리에 지은 성당이 1936년 수해로 침수되자 시내 중심지의 현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3대 이광재 신부가 1940년 성당과 교육회관을 완공했다.

그러나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겼고, 1948년부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양양 본당을 거쳐 남하할 때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갇혔다가 10월 9일 총살당했다. 전란 중 화재로 소실된 성당은 동명동 본당에서 사목하던 맥고완 신부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양양 지역을 맡아 사목하면서 신축하였다.

양양 성당은 이광재 신부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3년 이광재 신부 순교 기념각을 세웠다. 2000년 순교 50주년을 맞아 순교각 옆의 옛 수녀원 건물에 기념관을 개관하고, 전쟁 중 신자들이 옹기에 숨겨놓고 피난을 떠난 덕에 남은 이광재 신부의 제의와 제구, 친필 교리서 등의 유품과 사료들을 전시하였다. 이광재 신부는 2007년 1940-50년대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한 춘천교구의 조사를 통해 그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2009년 6월 9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옆에 석상이 봉헌되었다. 춘천교구는 2017년 9월 양양 성당을 성지로 선포했고, 현재 이광재 신부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안건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임당동 성당

금광리 본당으로 설립되어 영동 지역 신앙 중심지로 발전한.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0년대에 이미 강릉군 내에 삼정평, 새울, 금광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1921년 5월 양양 본당, 12월 금광리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금광리는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도 적어 1923년 말에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했다. 1929년 성당 화재 이후 잠시 금광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4년 발전 가능성이 더 컸던 강릉으로 다시 이전했다.

강릉으로 이전한 후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중 광복을 맞았고, 광복 후 본당의 내실화는 물론 사회복지와 교육사업 등을 통해 지역과 함께하는 본당 공동체를 구현했다. 1951년 대지를 매입한 뒤 1955년 10월 현재의 성당을 신축했고, 1974년 본당 명칭도 강릉 본당에서 임당동 본당으로 바꾸었다. 1981년으로 본당 설립 60주년을 맞아 교육관을 건립하였고, 1991년에는 성당 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청동 십자가, 제대, 14처, 유리화 등을 갖추고 1992년 11월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 화보집을 발간했다. 그리고 1998년 11월에 노후화된 사제관, 수녀원, 유치원을 신·증축하여 본당의 면모를 일신했다.

성당 앞 왼쪽에는 강릉 대도호부 관아가 있다. 이곳의 칠사당과 객사문에서 병인박해 당시 많은 신자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임당동 성당은 1950년대 강원도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외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부축벽을 이용한 입면 구성 및 내부의 정교한 몰딩 구성 등 의장 기법에서 보존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영동 지역 많은 본당의 모(母)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어 2010년 2월 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2019년 1월에는 성당 옆에 신축한 임당동 근대문화유산 유물전시관 축복식을 거행했다.


 

죽림동 주교좌성당 · 순교성지(교구 순교자 묘역)

6·25 전쟁 때 순교한 성직자와 교구 사제들의 안식처

죽림동 주교좌성당의 모체는 1920년 풍수원 성당에서 분가한 곰실 본당으로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의 헌신적인 전교 활동의 결과로 설립되었다. 청년 시절 우연히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구도의 길을 걷게 된 그는 가족과 함께 천진암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고은리의 한 폐가를 사서 정착한 후 자선과 모범적 신앙생활로 이웃들을 감화시켜 300명에 가까운 신자가 생겼다. 엄주언 회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1920년 공소를 건립하고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그해 9월 김유룡 초대 주임신부가 부임하여 춘천 지역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그 후 곰실 본당은 춘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1928년 현 죽림동 성당 아래 땅을 사서 춘천 본당을 설립하였다. 1938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춘천 본당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한 퀸란 토마스 신부는 부임 직후 인근 대지를 매입해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했다. 1940년 제2대 춘천 지목구장으로 임명된 퀸란 신부는 1949년 4월 새 성당 건립을 시작했지만, 다음 해 6·25전쟁의 발발로 인민군에게 피랍되었고, 성당 또한 1951년 5월 유엔군의 반격 공습 중 일부 파손되었다. 전쟁 중인 1951년 8월 제13대 주임으로 부임한 커머포드 신부는 복구 작업을 시작해 미군과 교황청의 도움으로 1953년 대부분 마무리했다.

1950년 본당명을 죽림동 본당으로 변경한 후 오랜 풍상으로 노후화되자 춘천교구는 죽림동 성당에 대한 대대적인 중창 작업을 시작했다. 특히 이번 작업에는 많은 미술가와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전례 거행에도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빼어난 성당을 만들었다. 또한 죽림동 성당 터를 마련하고 그 기초를 놓은 엄주언 회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성당 언덕 아래 춘천교구 가톨릭 회관으로 사용할 말딩회관(사제관 포함)을 건립하여 1999년 4월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2003년 6월 25일 죽림동 성당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되었다. 2013년 12월 1일 성당 앞 부지에 전정, 중정, 회랑 등을 지은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 축복식을 거행했고, 2014년 6월 1일에는 교구와 본당 주보인 예수성심상을 청동으로 제작해 설치한 후 축복식을 올렸다. 그리고 2017년 9월 6·25전쟁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죽림동 주교좌 예수성심 성당의 교구 순교자 묘역이 성지로 선포되었다.

 

포천 순교성지(복자 홍인 레오 순교터, 포천 성당)

복자 홍교만과 홍인 부자의 순교 정신이 살아 있는 곳

포천 지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아들 홍인 레오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신유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포천 지방으로 옮겨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다. 1900년 초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포천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설치된 이후 내촌, 맑은 데미, 송우리, 고일리, 오가리, 새묵이 등지에 공소가 설정되었다고 한다.

1956년 포천 본당이 설립된 데에는 6군단 군단장 이한림 가브리엘 장군의 도움이 컸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신앙 역사가 신유박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포천에 성당이 없는 것을 알고 1955년 포천 어디서든 잘 보이는 왕방산 기슭 언덕의 기증받은 부지에 화강석으로 성당을 건립했다. 1955년 11월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여 12월에 춘천 대목구장 퀸란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했다. 1956년 2월 김진하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포천 본당이 설립되어 춘천교구 서부 지역, 즉 경기 북부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되었다.

6ㆍ25 전쟁 후 군부대 지원을 받아 지어진 옛 포천 성당은 1990년 7월 한 취객의 방화로 목조 마룻바닥과 지붕틀 등이 불타 뼈대만 남았지만, 역사 보존 차원에서 1992년 12월 새 성당을 건립해 봉헌한 후에도 헐지 않고 보존했다. 옛 포천 성당은 전쟁 직후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특징과 화강석 조적구법을 잘 간직하고 있고, 전쟁 이후 군부대가 직접 건립한 것 중 유일하게 남은 종교 건축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9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홍교만과 홍인 부자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춘천교구는 같은 해 9월 홍인 레오의 순교터를 순교성지로 선포했다. 포천 성당은 순교터인 한내천변에 부지를 마련해 2015년 복자 홍인 레오의 순교 정신을 기리는 순교현양비를 건립해 축복식을 갖고 포천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포천 이벽 세례자 요한 묘와 생가 터

한국교회 창설 주역 중 한 명인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초기 신앙공동체를 구성한 인물이다. 이벽은 이승훈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아오게 했으며, 그 역시 1784년 겨울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식으로, 이벽의 집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처음 세례식이 집전된 역사적 장소이다. 이벽은 조선왕조 치하에서 순교한 신앙선조 가운데 제2차 시복추진 대상자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절차를 밟고 있다.

 

홍천성당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

홍천 지역에 언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1903년 풍수원 본당 교세 보고서에 송정 공소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공소 설립 시기는 1902-1903년 사이로 추정된다. 송정리(현 홍천군 화촌면)는 박해시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터를 일구고 산 옹기촌으로 유명했다. 1923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된 후 교세 확장을 위해 읍내에 부지를 매입하여 1936년 이전했다. 1939년 강원도 지역 사목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면서 골롬반회 소속 신부들이 본당 사목을 담당했다. 한국 전쟁이 종료될 즈음 부임한 최동오 신부는 1953년 9월 전쟁으로 파괴된 목조 성당을 재건하고 현 성당의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

한편 한국 전쟁 중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을 경험하고 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1954년 8월 주임으로 재부임한 크로스비 신부는 성당 신축 공사를 이어받아 1955년 4월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다. 미군 공병대의 도움과 최동오 · 크로스비 신부 그리고 신자들의 헌신으로 건립된 홍천 성당은 돌에 홈을 파서 끼워 넣는 식으로 외벽을 축조한 것이 특징이며, 특히 성당 바닥 마루는 그 아래 넓은 공간을 두고 습기 방지를 위해 새끼줄 타래를 깔아 놓아 현재까지도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다.

홍천 성당은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보존 및 연구 가치가 높아 2005년 4월 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보수작업을 벌여 정면과 측면 강화유리문을 동판으로 교체하고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석조물로 제단을 새로 꾸미고 안나의 집 증개축과 기도실을 신축하여 2006년 12월 중창(重創) 축복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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